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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Feb 04. 2020

야스쿠니 신사, 조선인 2만여 명 아직도 갇혀 있다

<17>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 일본 전역 신사 8만여 개 중 가장 큰 규모
유골은 없고 이름·소속·사망 장소 등 명부 작성해 합사
‘나라를 평화롭게’ 뜻과는 달리 전범 영웅 추대… 비판의 중심

 
일제강점기 동원된 조선인들, A급 전범들과 강제 합사
대한제국 이우 왕자도 日 국적 이유로 포함… 日 상대 취소 소송 기각
히로히토 일왕도 전범 합사 이유로 1975년부터 참배하지 않아  

                                                        

야스쿠니 신사 본전. 사진=www.timetravelturtle.com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함께 패망한 전범 국가다. 독일이 유대인 학살을 비롯해 전쟁에 대해 철저히 사과하고 반성한 반면 일본은 아직 진정 어린 사죄를 하지 않으며 전범들을 국가적 영웅으로 추대하고 있다. 이를 대변하는 건축물이 일본 도쿄 지요다구 왕궁 북쪽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이하 야스쿠니)다.

야스쿠니는 일본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9년 막부 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관군들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다. 만들어질 당시 명칭은 도쿄 쇼콘샤였는데 일본 전역에 세워진 쇼콘샤 중 하나였다. 1879년 ‘평화로운 나라’라는 뜻으로 현재의 이름인 야스쿠니로 개명됐다.

이곳은 일본이 벌인 보신전쟁과 청일·러일·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민간인 등 246만6000여 명의 넋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장소인데 일제강점기에 동원된 조선인 2만1000여 명도 강제로 합사된 서글픈 현실도 마주하게 된다. 오늘날 야스쿠니를 둘러싼 여러 가지 국제적 논쟁 중 그 중심에는 일본이 벌인 침략 전쟁사가 자리하고 있다.


1869년 세워진 도쿄 쇼콘샤로 출발


일본 신사(神社)는 왕실의 조상, 신 또는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이다. 야스쿠니는 8만여 개에 달하는 일본 전역의 신사 가운데서도 총 면적 9만3356㎡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곳에 유골은 없으며 이름과 소속, 사망장소 및 날짜 등이 기록된 명부를 작성해 합사가 이뤄진다.

야스쿠니의 역사는 에도시대(1603~1867)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한 후 일본은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관군과 도쿠가와 막부 측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1868년 1월 교토 근교의 도바·후시미 전투로 시작된 보신전쟁은 1869년 5월 막부 군의 최후 거점이었던 하코다테가 함락되면서 끝나게 된다. 그해 6월 메이지 일왕의 지시로 보신전쟁에서 사망한 관군 3588명을 추모하기 위해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 성스러운 혼들이 부름을 받은 도쿄의 사당)가 건립됐다. 일반 신사가 내무성 관할인 반면 야스쿠니는 육·해군성이 관할하는 신사로, 군사시설 성격을 지녔으며 종교적 시설로 취급되지 않았다.

1879년 군에 의해 『좌씨춘추』(『춘추(春秋)』를 해설한 책)의 ‘오이정국야(吾以靖國也)’에서 따온 말인 야스쿠니(靖國), 즉 ‘나라를 평화롭게 한다’는 뜻으로 개명됐다. 이곳은 1879년 이후 일왕이 직접 참배하는 신사라는 특별한 지위인 별격관폐사(別格官弊社: 신화에 나오는 신이나 왕, 왕족을 제사 지내는 신사 다음으로 격이 높은 신사)도 부여됐다.

1942년 히로히토 일왕(맨 앞)의 야스쿠니 참배. 그는 A급 전범의 합사를 이유로 1975년부터 1989년 사망할 때까지 야스쿠니 참배하지 않았다. 사진=apjjf.org


일본의 대륙침략전쟁 본격화되며 국가 중심의 신사로 떠올라


히로히토 일왕의 재위 기간인 쇼와시대(1926~1989)에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일왕이 야스쿠니에 참배하는 빈도가 늘었다. 1931년 9월 19일 만주침략전쟁의 시작이 된 만주사변 직후만 해도 야스쿠니에서 매년 한 차례 열렸던 임시대제(국가 전체가 제사 공동체임을 보여주는 행사)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열렸다.


전쟁이 심화할수록 야스쿠니의 중요성은 더욱 커져 점차 신사들 가운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벌인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 야스쿠니에서 각 지역·단체 대표 1만5000여 명이 참여한 전승기원 각계대표자대회가 열렸으며 제국재향군인회 주최로 한 미영격멸대회에는 21만 명이 참배했다. 출정을 앞둔 군인들에게 야스쿠니 참배는 남달랐는데 가미카제 대원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유슈칸(遊就館, ‘遊’와 ‘就’는 고결한 인물과 어울리며 배운다)은 야스쿠니의 부속 전시관이자 전쟁박물관으로 1882년 개관했다. 사진=www.timetravelturtle.com


1978년 A급 전범의 합사

히로히토 일왕은 1945년부터 1975년까지 8차례에 걸쳐 야스쿠니에 참배했으나, 1975년 이후부터는 A급 전범 합사를 이유로 1989년 사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추가 참배하지 않았다.

1946년부터 2년간 도쿄에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열려 일본의 전쟁범죄자 28명을 기소, A·B·C급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56년 A급 전범을 사면으로 석방한 데 이어 1959년부터 B·C급 전범을 야스쿠니에 합사하기 시작해 1970년대 거의 완료한 상태였다. 이후 1978년 10월 17일 태평양전쟁을 주도했던 도조 히데키, 조선총독을 지낸 고이소 구니아키, 만주사변 주모자 이타가키 세이시로, 난징 대학살의 주범 히로타 고키 등 A급 전범 14명을 비밀리에 합사했다. 일본 정부는 합사 근거로 후생성으로부터 받은 제신명표(祭神名票, 군인 군속 사망자 명단)와 A급 전범이 일본 국내법상으로는 범죄자가 아니라는 점을 들었다.


한국의 광복절이자 일본의 패망일이기도 한 8월 15일에 야스쿠니에서는 우익 단체들의 각종 정치 행사가 열린다. 사진=www.japanesehistory.de


야스쿠니 상징, 평화의 뜻 가진 흰 비둘기 ‘아이러니’

야스쿠니에는 19세기 말 청일·러일전쟁, 태평양전쟁은 물론 한국의 의병 진압 등 근대 일본의 식민지 획득과 지배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과 민간인 등 246만6532명의 합사 명부가 봉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1910년 9월 15일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을 기념해 한국병합 봉고제(奉告祭: 어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이를 신에게 받들어 고하는 제의)를 올린 치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이후 일본의 전쟁에 동원돼 사망한 2만1000여 명의 한국인도 야스쿠니에 합사됐는데 사망 당시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제국 황제의 후손인 이우 왕자도 1959년 10월 17일 합사에 포함됐다. 야스쿠니에 합사된 사실조차 몰랐던 한국 황실 유족들은 2001년 일본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야스쿠니 합사 취소소송을 벌였지만 모두 기각됐다.

올해는 야스쿠니가 지어진 지 150주년이 되는 해다. 야스쿠니 측은 지난해 아키히토 일왕에게 기념 참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하지만 야스쿠니는 일본 왕실이 경비를 부담하는 특별 관폐(官幣: 국가가 재정이나 운영을 맡는 것) 신사로서 군국주의 확대정책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해오고 있다.


야스쿠니는 20개의 전시실과 전쟁 관련 유품 5만5000여 점이 소장된 군사박물관인 유슈칸(遊就館)을 비롯해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무라 에키지의 동상, 가미카제 돌격대원의 동상 등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전범자들을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하는 역할을 오늘날까지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일 제사가 열리는데 일본 건국기념일(2월 11일)과 종전기념일(8월 15일)에는 일본 우익단체들이 모여 시위를 벌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야스쿠니의 상징은 평화를 상징하는 흰 비둘기라고 한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10월 21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1021/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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