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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Feb 05. 2020

콜로세움, 전쟁포로 사형장에서 사형제 폐지 상징물로

<18> 이탈리아의 콜로세움

현존하는 로마제국의 가장 거대한 건축물
1차 유대전쟁 전리품과 포로들로 건축
파시스트 집회·독일군 폭탄보관소 활용도

                                                        

콜로세움 전경. 사진=픽사베이.


콜로세움은 현존하는 로마 제국의 가장 거대한 건축물로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이다. 사실 원형경기장은 이탈리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대부분 도시 외곽 지역에 있었던 것과 달리 콜로세움은 도시 중심부에 있다. 


이곳은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건설을 시작해 그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80년 완공했다. 콜로세움 남쪽 입구에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전리품으로 새 원형 경기장을 지었다’라는 헌납 비문이 남아 있다. 콜로세움이 1차 유대전쟁(66~73)의 전리품과 포로들로 건축됐기 때문이다. 전쟁 포로가 된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20㎞ 정도 떨어진 채석장에서 돌을 옮기며 콜로세움을 지었다. 


서기 72년 베스파시아누스가 건설 시작

로마는 대규모 정복 전쟁을 통해서 지중해 연안과 유럽 대부분을 차지한 대제국이었다. 그런 로마제국의 시민들에게 원형경기장은 공공 오락시설물이었다. 약 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이곳은 검투사들의 결투와 동물 사냥이 열렸고 고전극을 하는 무대로도 활용됐다.


이곳에서 펼쳐지는 검투 경기는 단연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검투사들은 당시 대부분 전쟁 포로와 노예 또는 범죄자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인기를 받는 유명인들이었다. 동물 사냥 경기 때에 쓰인 타 지역의 동물들은 로마가 정복한 다른 도시들을 로마 시민들에게 환기하는 정치적 상징의 의미이기도 했다. 통계적으로 콜로세움에서는 대략 50만 명의 검투사와 100만 마리가 넘는 동물이 죽었는데 우리 안의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콜로세움(Colosseum)’이라는 이름은 네로 황제가 자신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30m 높이의 동상인 ‘콜로서스 네로니스(Colossus Neronis, 거대한 네로)’ 앞에 지었기에 거대하다는 뜻의 라틴어 ‘콜로살레(Colossale)’에서 유래했다.

이곳의 규모는 직경의 경우 긴 쪽이 188m, 짧은 쪽이 156m이고 둘레는 약 527m이며 높이는 약 48m이다. 1층은 간소하지만, 무게감이 느껴지는 도리아식, 2층은 부드럽고 섬세한 이오니아식, 3층과 4층은 화려하고 풍성한 코린트식 등으로 그리스·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세 건축 양식이 총동원됐다. 외벽은 대리석으로 장식됐고 경기장 바닥에는 나무를 깔고 흘린 피를 위장하기 위해 종종 붉은색을 띠는 모래를 덮었는데 아레나라고 불렀다.

                    

가브리엘 블랑샤르가 1672년 그린 ‘로마의 콜로세움을 건설한 베스파시아누스’. 사진=베르사이유와 트리아농 궁 소장


69년 12월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의 제9대 황제가 됐다. 새로운 황제에게 주어진 임무는 내전으로 황폐해진 로마를 재건하고 전 황제이자 폭군이었던 네로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브리타니아 지역 정복을 통해 명성을 얻은 군인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네로의 황금 궁전을 허물고 원형경기장 건립을 계획했다. 이 황금 궁전은 64년 로마에 큰 화재가 일어나 도시의 삼분의 이가 불타고 수천 명의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네로가 일반시민들의 주거지였던 화재 지역을 몰수해 건립한 황제의 초호화 궁전이었다. 하지만 원대한 계획과는 달리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서기 79년에 세상을 떠나며 콜로세움 건설이 완성되는 것을 지켜보지 못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며 1차 유대전쟁에 승리한 후 71년에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 행렬이 줄을 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집권했을 당시 로마 재정은 내전으로 파탄 상태였는데 유대 원정의 전리품들은 재정을 충당시키고 콜로세움 건축에 쓰였다. 티투스가 전쟁 포로로 끌고 온 유대인 10만여 명 중에서 4만여 명은 콜로세움 건설에 투입되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려 건축비로 마련됐다.


서기 80년 티투스 황제에 의한 100일 축제

아버지에 이어 즉위한 티투스는 서기 80년 3층까지 완공된 콜로세움을 공식 개장해 국민의 신뢰를 쌓기 위해 100일 동안 축제를 열었다. 100일 동안 지속된 이 행사에서 2000명의 검투사와 5000마리의 야생 동물이 희생됐다.
                    

울 피아노 체카가 상상해 그린 콜로세움 경기장의 모의 해전 나우마키아’(Naumachia). 사진=www.snipview.com


티투스의 뒤를 이은 동생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콜로세움의 맨 위층인 4층을 추가로 올렸다. 현존하는 콜로세움의 모습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 비로소 완성됐다. 이 황제 때에 콜로세움 경기장 내부에 물을 채우고 배를 띄워 모의 해전인 ‘나우마키아(Naumachia)’를 했다는 고대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모의 해전이 있을 때는 경기장의 무대와 기둥들을 치웠다가 다시 설치하는 식으로 운용했다는 게 밝혀졌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물이 새지 않도록 막는 방법과 어떻게 배가 원형경기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등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콜로세움에서는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 이전까지 200여 년 동안 신성 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많은 기독교인이 처형됐다. 검투 경기는 기독교 확산으로 살인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으며 399년에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죽음의 공간에서 생명존중 공간으로 변모

콜로세움은 중세시대 초기까지도 원형경기장으로 사용되다가 중세 이후에는 로마에 세워진 교회나 궁전 건축을 위한 건축자재 공급처로 사용됐다. 사실 기독교 지배 후에 콜로세움의 아치마다 놓여있던 수많은 조각상과 벽면을 장식하던 대리석들은 모두 제거되고 떼어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떼어졌다. 그렇게 웅장했던 경기장은 소홀히 관리됐고 여러 차례 일어난 지진까지 겹쳐서 계속 손상됐다. 1749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콜로세움에서 석재를 가져가는 것을 금지하고 이곳에서 죽은 기독교 순교자들을 위해 중앙에 십자가를 세웠다.

1930년대에는 무솔리니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콜로세움에서 파시스트 집회를 개최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콜로세움은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은 히틀러의 독일군 폭탄 보관소가 됐는데 현재 발굴 중으로 그 당시의 무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오늘날 콜로세움은 원래 모습의 삼분의 일도 안 남은 채로 뼈만 앙상한 모습이다. 전쟁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죄수들에겐 잔인한 사형장이었던 콜로세움은 1999년부터 사형제도 폐지의 국제 캠페인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로마시는 각국에서 사형제도가 유예되거나 폐지될 때마다 콜로세움을 비추는 야간 조명을 다르게 해서 사형제도 폐지를 옹호하고 있다. 이렇게 수천 년간 죽음의 공간이었던 콜로세움은 오늘날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건축물로 거듭나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10월 28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1028/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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