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이상아트 Feb 10. 2020

왕 대관식부터 무명용사 추모까지…

<21>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천년 이어온 英 성공회 대표 성당
셰익스피어·호킹·오스카 와일드…
역대 왕·위인 등 3300명 안식처
1920년엔 ‘무명용사의 묘’ 설치

                                                        

웨스트민스터 사원 전경. 사진=www.visitbritain.com.


영국 런던 템스강 북쪽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은 11세기부터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영국 왕실의 대관식·결혼식·장례식 등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곳이자 장지(葬地·묘지)로 영국 성공회(기독교의 한 교파)의 대표적인 성당이다.

이곳에서 1066년 정복왕 윌리엄 1세가 대관식을 거행한 이래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까지 역대 왕들이 왕위에 올랐다. 영국 왕위 계승자들은 대관식 직후 ‘에드워드 왕의 어좌(임금의 자리를 뜻하는 말로 성 에드워드의 왕좌라고도 불린다)’에 앉아야 왕위에 오른 것으로 인정받는다. 대관식 의자 아래에는 스코틀랜드 역대 왕들이 즉위할 때 앉았던 ‘스콘의 돌(Stone of Scone)’이 놓여 있다. 이 돌은 직육면체 모양의 사암으로 기적의 돌로도 불린다. 스콘의 돌은 1296년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으로 얻은 전리품으로 대관식마다 쓰이면서 영국 왕위 계승에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한다.

사원 지하에는 역대 왕들은 물론 스티븐 호킹, 셰익스피어, 오스카 와일드 등 3300명이 넘는 영국 저명인사들의 묘와 기념비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0년 11월 11일 무명용사의 묘가 사원 입구 바닥에 안장된 이래 영국의 모든 대외 전쟁 전사자를 추모하는 행사가 영국 왕실, 참전용사, 유가족들이 참여한 가운데 매년 11월 11일 열린다. 


13세기 헨리 3세에 의해 고딕 양식으로 개축

1040년대 참회왕 에드워드(1003~1066)가 템스 강변에 궁전을 세우며 960년경 성 던스턴이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을 위해 세운 수도원을 성 베드로를 기리기 위한 석조 교회로 개축했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사원 역사의 시작이다. 세월이 흘러 궁전과 사원 인근 지역을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라고 불렀다. 런던시 동부에 있는 교회당인 세인트 폴 성당과 구별하기 위해 ‘서부에 있는 교회당(West Monastery)’으로 부른 것이다. 정식 명칭은 ‘웨스트민스터 성 베드로 참사회성당(Collegiate Church of St. Peter in Westminster)’이다.

에드워드 왕은 1065년 12월 28일 새 교회가 봉헌된 후 1주일 만인 1066년 1월 5일 병사해 이곳에 묻혔다. 그의 죽음으로 왕위를 둘러싼 전쟁이 시작되고 정복왕으로 불린 윌리엄 1세가 1066년 이곳에서 왕위에 오르며 모든 왕의 대관식 장소가 됐다.

                    

대관식 의자 정면 사진. 1998년 2월부터 헨리 5세의 무덤 근처에 있는 현대식 받침대에 세워져 보관돼 있다. 사진=웨스트민스터 사원 홈페이지


헨리 3세(1207~1272)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대신 글로스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아버지인 존 왕이 귀족과의 내전으로 벌인 1차 남작전쟁(1215~1217) 말기인 1217년 프랑스의 왕자 루이가 런던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황은 이를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전쟁이 끝난 이후인 1220년 5월 17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다시 한 번 거행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바로 이런 연유가 있던 헨리 3세에 의해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그는 당시 프랑스의 고딕 건축물인 아미앵 대성당과 랭스 대성당을 모델로 이곳을 1245년부터 개축했다. 왕의 법령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위대한 수도원이자 예배 장소일 뿐만 아니라 군주들의 대관식과 묘지로 설계됐다. 새로운 교회는 1269년 10월 13일 봉헌됐다. 불행히도 왕은 본당을 완성하기 전 숨을 거뒀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높다란 수직형의 건물과 곳곳에 세워진 뾰족한 첨탑이 특징인 고딕 양식의 모습은 1503년에서야 완성됐다. 이 사원의 총 바닥 면적은 908평(3000㎡)이다. 사원 출입구에 해당하는 서쪽의 정면 탑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가장 높은 부분으로 69m에 달한다.


에드워드 1세가 가져온 ‘스콘의 돌’

1272년 부왕인 헨리 3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1세(1239~1307)는 브리튼 섬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하길 염원하면서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정복을 시도했다. 1286년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3세가 해안 절벽에서 낙마 사고로 사망했을 때 유일한 후계자는 노르웨이에 살고 있던 세 살짜리 손녀 마거릿 공주였다. 에드워드 1세는 노르웨이 왕 에리크 2세에게 양가의 혼인 약속을 받아냈다. 1290년 7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솔즈베리 조약으로 이 결혼을 승인하면서 스코틀랜드는 독립국으로 남을 것임을 발표했다. 그러나 마거릿이 스코틀랜드로 배를 타고 오던 도중 사망하자 존 베일리얼과 로버트 브루스를 비롯해 여러 명의 스코틀랜드 왕위 주장자가 나타났다. 절충자로 선임된 에드워드 1세는 베일리얼을 선택해 1292년 그가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에드워드 1세가 베일리얼에게 신하로서의 충성과 함께 가스코뉴 지역의 전쟁 참가를 요구하자 1295년 베일리얼은 에드워드와 적대하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1296년 3월 3만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진해 웨일스인들이 사용한 장궁(긴 활)의 도움으로 스코틀랜드를 격파한다. 베일리얼을 포로로 잡아 왕위를 내려놓게 한 뒤 스스로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르고 영주들의 맹세를 받았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왕의 대관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던 직육면체 형태의 돌인 ‘스콘의 돌’을 전리품으로 챙겨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보냈다. 또 왕이 없는 스코틀랜드를 몰수한 봉토로서 잉글랜드에 병합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스코틀랜드 지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297년 윌리엄 월러스를 지도자로 한 민족적 저항이 일어난 이후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1307년 에드워드 1세는 반란을 진압하려고 스코틀랜드로 향하다 병사한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대관식 의자 아래에 놓인 스콘의 돌은 1296년부터 스코틀랜드가 아닌 잉글랜드 왕의 대관식에 쓰이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대관식 의자는 글로스터 대성당으로 대피했고 돌은 비밀리에 수도원 내에 매장됐다. 스콘의 돌은 종전 후인 1950년 12월 25일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게 도난당했다가 1951년 4월 되찾았다. 이 돌은 1996년에서야 스코틀랜드에 반환됐으며 현재는 에딘버러 성에서 볼 수 있다.


1920년 11월 11일 안장된 무명용사의 무덤

1차 대전 종전일 2년 뒤인 1920년 11월 11일 사원의 본당 서쪽 끝 내부 바닥에 프랑스에서 사망한 신원을 알 수 없는 영국 육군을 ‘무명용사의 무덤’에 안장했다. 존 조지프 퍼싱 장군은 미국을 대표해 1921년 10월 17일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이 무덤은 전쟁에서 전사한 영국군 모두를 기리는 상징이 됐다. 유럽 문화 특성상 교회 바닥에 안치된 무덤은 밟아도 상관없지만, 무명용사의 무덤만은 밟는 걸 금기시한다.

                    

지난 2011년 4월 29일 영국 윌리엄 윈저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의 결혼식 모습(좌)과무명용사의 무덤(우). 사진=www.seventeen.com


이 사원에서 가장 최근에 열린 결혼식이었던 2011년 4월 29일 윌리엄 윈저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 때도 이곳을 피해 지나갔다. 1923년 4월 26일에는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열렸다. 당시 엘리자베스가 입장하던 중 1차 대전 때 전사한 오빠 퍼거스를 추도하며 무덤 위에 꽃다발을 존경의 표시로 올린 후 모든 왕실의 신부는 결혼식이 있을 때마다 다른 곳에서 결혼하더라도 무명용사의 무덤 위에 꽃다발을 올려놓는 것이 관례가 됐다.

그리고 영국 왕실의 해리 왕자와 부인 메건 마클 왕자비는 지난 7일 웨스트민스터 사원 밖에 있는 ‘기억의 들판’을 방문해 제1·2차 대전에서 순직한 군인들을 추모했다. 이곳에서 17일까지 추모행사가 열렸는데 많은 이들이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렸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11월 18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1118/1/BBSMSTR_000000100082/view.do


매거진의 이전글 나폴레옹의 치욕과 드골의 영광 함께 하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