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아트 Feb 11. 2020

수난의 무게에 무너진… 빅토르 위고도 한탄

<22>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성

두 번의 전쟁으로 성 대부분 파괴…

일부만 복구된 채 그대로 보존


두 번의 전쟁과 자연재해 등으로 성벽 곳곳이 파괴된 채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 하이델베르크 성의 현재 모습. 사진=하이델베르크 성 홈페이지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있는 대학 밀집 도시로 유명한 하이델베르크에 30년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고성, 하이델베르크 성이 있다. 30년 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유럽에서 펼쳐진 종교전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졌는데 주로 독일이 그 전장이었다. 종교전쟁으로 시작해서 영토전쟁으로 끝난 이 전쟁은 가장 잔혹한 전쟁사 중 하나로 기록돼 있는데 독일 전체가 황폐해졌으며 사망자 수는 무려 800만 명에 달한다.


13세기 지어진 하이델베르크 성은 30년 전쟁 때 양 진영에 점령당하며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복원 작업을 다 마무리하기도 전에 팔츠 계승 전쟁(1688~1697)에 휘말리면서 성 대부분이 파괴됐고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일부 복원이 이뤄졌다. 이 성은 독일에서는 드물게 중세 시대 건축물로 현재까지 보존돼 있다.


게릿 반 호르 토스트가 1634년 그린 프리드리히 5세의 초상화. 프리드리히 5세가 1619년 보헤미아의 왕이 되면서 30년 전쟁이 시작됐다. 사진=하이델베르크 팔츠 박물관 소장


13세기 지어진 성…‘신성한 산’이란 뜻


독일 지명에서 자주 등장하는 ‘베르크(berg)’는 산 또는 산맥을 의미하는데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는 ‘신성한 산’이란 뜻이다. 도시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네카어 강 동단 남쪽의 쾨니히스툴 산 남쪽 기슭 80m 높이에 이 성이 있다. 해당 건축물은 적 공격을 막기 위한 깊이 20m의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 해자를 건너는 도개교(큰 배가 밑으로 지나갈 수 있도록 위로 열리는 구조로 만든 다리), 적 침입을 감시하는 종탑, 루트비히 5세가 세운 높이 52m의 성문탑 및 현재 무너진 상태로 높이가 33m인 화약탑, 감옥탑 등 여러 탑과 최대 두께가 7m나 되는 크고 작은 궁전들이 있다. 이 성의 전체 건물과 대지 면적은 기록이나 문서로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


건립 시기는 1155년 호헨스타우펜 가문이 하이델베르크 성을 중심으로 한 팔츠 지역(Pfalz·독일 서남부에 있던 옛 지명, 신성로마제국의 연방국가)을 소유하게 됐고 선제후(신성로마제국에서 독일 황제를 뽑는 권한을 가진 제후)가 됐다고 명시된 몇몇 문서들로 유추해볼 수 있지만 정확한 정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이델베르크 성은 1225년 요새로 축조돼 1294년 두 개의 성으로 확장됐는데 현재 위치보다 더 높은 산허리에 세워진 위쪽 성은 1537년 벼락을 맞아 파괴됐다.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수 세기에 걸쳐 증개축이 반복됐으며 초기 건설된 궁전 중에서 루드비히관과 오토 하인리히관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꾸며졌다. 또 외곽과 보루 등의 요새는 후기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 마지막 건설된 프리드리히관은 바로크 양식 등 여러 양식이 혼용된 웅장한 사암 건축물로 완공됐다. 1607년 완공된 프리드리히관은 하이델베르크 성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히며 여행자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이다.


자크스 푸키에르가 그린 1620년경 하이델베르크 성의 정원. 30년 전쟁을 겪으며 대부분 파괴됐다. 사진=하이델베르크 팔츠 박물관


30년 전쟁으로 내외부 크게 훼손


1517년 독일의 신학 교수인 마르틴 루터에 의해 유럽에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17세기 초는 로마 가톨릭을 믿는 구교파와 신교파(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이 여전한 시기였다. 1618년 구교를 믿는 보헤미아(오늘날의 체코 지역)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1578~1637)가 신교의 종교 자유를 보장했던 칙령을 취소한 것이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됐다. 이에 1619년 보헤미아 의회는 페르디난트 2세 대신 팔츠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5세(1596~1632)를 왕으로 세우게 된다. 이를 계기로 30년 전쟁이 본격화됐다. 이 전쟁 동안 하이델베르크 성은 양 진영으로부터 공격받고 점령당하며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프리드리히 5세는 여왕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를 위해 1619년 바로크 양식의 팔라틴 정원(Hortus Palatinus·호르투스 팔라티누스로 ‘마법의 정원’을 의미)을 지었는데 조경기술이 뛰어나 당시 ‘세계의 8번째 불가사의’라는 평을 받았으나 전쟁 동안 대부분 파괴됐다.


1622년 5월 6일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1559~1632)가 이끄는 신성로마제국과 가톨릭 동맹의 군대가 빔펜 전투에서 신교 군대를 무찌르고 1622년 9월에 하이델베르크 성을 점령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공식 퇴위했고 가톨릭 동맹의 수장인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가 팔츠의 선제후가 됐다. 이후 1630년대 신교 측의 대반격이 시작됐는데 스웨덴 군이 1633년 5월 5일 하이델베르크 시를 점령하고 성에 불을 지르자 가톨릭 측은 성을 넘겨줬다. 이듬해 가톨릭 측은 성을 재탈환하려고 했으나 프랑스가 스웨덴을 지원하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로도 몇 번의 공방전으로 주인이 계속 바뀌었고 성은 계속 파괴됐다. 마침내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종교전쟁은 신교의 승리로 끝나며 이곳에서의 전쟁도 일단락됐다.


30년 전쟁 중인 1622년 9월 19일, 틸리 부대에 의해 점령당한 하이델베르크 성의 기록화. 사진=de.academic.ru


팔츠 계승 전쟁 때 프랑스 군 점령으로 피해


1649년 다시 팔츠 선제후가 된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인 카를 루트비히(1617~1680)는 부서진 하이델베르크 성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기에 1650년 재건하기 시작했다. 새 선제후는 자신의 딸을 프랑스 루이 14세의 동생이었던 오를레앙 공작에게 시집보내며 프랑스 왕실과의 결혼을 통해 세력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그의 사후에 오히려 분란이 일어난다. 선제후의 후계자가 없자 루이 14세가 오를레앙의 아내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에게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통하지 않자, 프랑스 군사를 이끌고 독일 지역을 침공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팔츠 계승 전쟁(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 또는 9년 전쟁)이다.


루이 14세의 프랑스 군은 1689년 하이델베르크 성을 점령했지만, 전투는 실패로 끝났고 프랑스 군은 그해 3월 성을 떠나며 곳곳에 불을 질렀다. 그 이듬해에 재정비한 프랑스 군은 하이델베르크에 3년간 공격을 퍼부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또한 프랑스 군은 1693년 성에 진입해 3년간의 공격으로도 파괴하지 못했던 성벽과 성탑을 화약으로 폭발시켜 폐허로 만든다. 이때 원래 세웠던 감시탑도 파괴돼 1718년 둥근 아치형 입구로 교체됐다. 팔츠 계승 전쟁은 1697년 9월 네덜란드에서 레이스베이크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됐다.


1720년 선제후 카를 필립이 하이델베르크에서 가까운 만하임에 바로크 양식의 새 왕궁인 만하임 성을 건설하며 이곳으로 정부를 옮겼다. 1750년대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는 하이델베르크 성과 도시를 재건하며 만하임 성에서 다시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1764년 6월 24일 번개로 화재가 발생해 일부 재건된 부분까지도 파괴되면서 이 성은 재건을 포기한 상태로 버려졌다. 그 후 시민들도 집을 짓기 위해 폐허가 된 성에서 쓸 만한 돌이나 자재들을 가져가며 성의 수난은 계속됐다.


1838년 이곳을 방문한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는 성터 유적지 산책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 성은 유럽을 뒤흔든 모든 사건의 피해자가 돼 왔으며 지금은 그 무게로 무너져 내렸다. 루이 14세가 그것에 큰 타격을 입혔다”라고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성의 훼손에 대한 감회를 남겼다.


1890년 성재건위원회가 구성돼 온전한 상태로 이 성을 재건하는 것이 기술 부족과 경제적 비합리성을 비롯해 여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 파괴된 성의 외부는 기존 형태로 보존해두고 불에 탄 내부만 복구공사를 벌여 지금의 모습이 됐다.


하이델베르크는 1386년 세워진 독일 최초의 대학인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있는 학문의 도시로, 경제나 산업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의 폭격을 피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3월 30일 미군이 유럽 주둔 총사령부를 하이델베르크 시에 설치한 이후 2011년까지 주독 미군의 거점이 됐다. 매년 세계 각국에서 300만 명의 관광객이 하이델베르크 성을 찾는다. 성은 외부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훼손된 모습 그대로 보여주며 전쟁의 참상을 오롯이 전하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11월 25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1125/1/BBSMSTR_000000100082/view.do


매거진의 이전글 왕 대관식부터 무명용사 추모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