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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Feb 19. 2020

끝나지 않은 위기…전쟁으로 스러진 ‘역사의 땅’

<28> 시리아의 알레포 성채

기원전 16세기 무렵에 첫 건설 추정
시리아 종교·역사의 중심지로 발전
리처드1세 십자군 원정 막아냈으나
몽골·티무르 제국 침략에 내부 파괴
내전으로 문화유산 6곳 막대한 피해
 

                                                        

알레포 성채의 전경. 사진=gurushots.com.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북쪽으로 350㎞ 떨어진 알레포는 기원전 3000년 전부터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번성한 도시로, 지중해와 유프라테스 강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히타이트와 이집트,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 아랍, 몽골, 오스만튀르크 등 수많은 외침을 받았던 알레포 성채(성과 요새를 아울러 이르는 말)는 알레포의 중심가 언덕에 있는 견고한 요새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리아 역사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이곳은 기원전 16세기 처음 지어져 13세기에 지금과 같은 형태로 완성됐다. 이 성채에서 십자군 원정을 막아냈으나 몽골군과 티무르 제국의 침략으로 내부가 크게 파괴됐으며, 2012년부터 발발한 시리아 내전 중 알레포 전투(2012~2016)의 주요 전장이 되면서 성벽 일부가 파손됐다. 시리아 내전은 현재 진행 중으로 알레포 성채의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원전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알레포는 해발 400m 고원에 있는 도시로 아랍어로는 할랍(Halab)이라고 불린다. 알레포 성채는 기원전 16세기 무렵인 청동기 시대에 처음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기원전 10세기에 신(新) 히타이트인들이 이곳에 신전을 세우면서 알레포 성채가 외부에 알려졌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의 속주(로마의 본국 이외의 가장 큰 행정 단위)였던 시리아에 흡수·통합됐다. 440년 페르시아에 점령된 뒤 도시가 황폐해졌다. 알레포 성채의 방어벽을 뚫지 못했던 페르시아 군이 병사들에게 염소 가죽을 씌우고 염소로 위장해 성벽을 통과하게 한 다음에 성문을 열었다고 전해진다. 636년 이슬람군에게 점령된 뒤, 알레포는 다시 문화와 상업의 중심지로 각광받는다. 944년 알레포를 중심으로 시리아 북부를 장악한 함단 왕조 시기에 예술과 과학, 종교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이스마일 알 자 자르가 1185년 이전에 그린 살라딘의 초상화. 사진=mesazhi.com


십자군 전쟁과 술탄 살라딘


알레포 성채는 서유럽 그리스도교도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200여 년간 8차례의 원정을 감행한 십자군 전쟁(1095~1291)의 주요 무대가 된다. 알레포는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북부 시리아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이슬람 세력의 기지였다. 특히 이곳은 구약성서의 사본 가운데 하나인 ‘벤 아셔’ 사본이 보존됐던 곳으로 십자군이 노리는 주요 장소가 됐는데 1099년 급기야 제1차 십자군이 40일간의 포위공격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그러나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는 술탄이자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인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욥의 아들이며 정의로운 신앙인 요셉’이라는 뜻, 이하 살라딘·1137~1193)는 1184년 알레포를 점령했으며 십자군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1187년 10월 2일 예루살렘을 재탈환했다. 살라딘은 제3차 십자군 원정(1189~1192) 때 십자군을 대표하는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1157~1199)에 맞서 싸우며 예루살렘을 지켰다. 살라딘의 아들인 아즈자히르 가하지(1172~1216)가 십자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1193년부터 1215년 사이에 성을 재건하고 강화하면서 오늘날의 알레포 성채가 만들어졌다. 십자군 전쟁 동안 알레포 성채는 함락되지 않았다.


알레포 성채의 성벽 길이는 약 4.8㎞로, 성채의 길이는 450m, 너비는 325m이다. 7개의 다리가 놓인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는 깊이가 22m이고, 폭은 30m이다. 성채 내부에는 궁전, 이브라힘 사원, 신학교, 목욕탕, 박물관 등이 있다. 성채 북쪽에는 총을 내놓고 쏠 수 있는 총안을 설치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50m 높이의 탑들이 가파른 성의 외벽에 세워져 있다. 사방이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성채의 유일한 관문은 남쪽의 탑 바깥쪽을 통해 들어가는 문으로 이곳을 막아서면 난공불락이 된다.


알레포 성채의 내부 모습. 사진=theguardian.com


몽골군과 티무르 제국의 침략으로 큰 피해


새로운 방비에도 불구하고 13세기 몽골군이 침략하면서 알레포 성채는 위기를 맞게 된다. 몽골족의 훌라구 칸(1218~1265)이 1259년 약 40만의 군대로 시리아를 공격해 이듬해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가자 등을 점령했다. 이때 알레포 성채는 몽골군에 의해 성벽과 내부가 파괴됐다.


1400년에 이르러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1336~1405)가 몽골족처럼 지중해를 향해 진격해 알레포 성채 내부의 거의 모든 건물이 파괴됐다. 티무르는 이곳을 퇴각할 때 성채에 불을 질렀고, 이후 알레포는 1516년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일부로 이스탄불과 카이로에 이어 제3의 도시가 됐다. 이 성채는 술탄 술레이만 1세(1494~1566)에 의해 복원됐고, 방어 요새로서 군사적 역할이 줄어드는 대신 병사들의 막사로 사용됐다.


1822년 일어난 지진으로 알레포 성채는 외곽 성벽을 남겨 놓고 모두 무너지고 내부 건물은 폐허가 됐다가 1850년경 술탄 압둘메시드 1세에 의해 복원됐다. 제1차 세계대전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붕괴 이후, 알레포는 1920년 9월 프랑스 총리 앙리 구라우에 의해 프랑스령(1920~1945)이 된 기간 동안 군인들이 주둔했다. 1946년에 시리아가 독립한 후 성채의 복구가 시작돼 1970년대부터 관광지가 됐는데 아무도 그 후 다시 전쟁을 겪을 줄 몰랐다.


1993년 촬영된 알레포 성채의 전경 사진. 사진=theguardian.com


시리아 내전 중 알레포 전투로 큰 피해


시리아 내전(2012~)은 1971년부터 2대에 걸친 알아사드 정권의 장기 독재와 경제적 빈곤 등으로 인한 민주화 시위로부터 시작해 수니파-시아파 간 종파 갈등, 주변 아랍국과 미국과 러시아 등 국제 대리전 등으로 커진 내전이다. 알레포 전투(2012~2016)는 시리아 내전 중 가장 큰 전투로 2만1000여 명이 사망했다. 2012년 7월 19일 알레포 동부 지역을 점령한 반군과 서부 지역을 점령한 정부군이 충돌해 전투가 시작됐다. 2015년 9월부터 러시아가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면서 전황은 정부군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정부군이 반군 지역을 대부분 장악하면서 패색이 짙어지자 반군은 2016년 12월 13일 휴전 협정을 통해 알레포에서 철수를 결정했고, 그해 12월 22일 정부군이 알레포의 전 지역을 통제해 알레포 전투는 끝났다.


2016년 12월 13일 알레포 성채 인근에 포탄의 잔해가 남아있는 모습. 사진=www.newsweek.com


알레포 성채는 전장의 최전선으로 곳곳이 피해를 입었다. 반군은 공격을 피하기 위해 성채 뒤에 숨었지만 정부군은 문화유산을 공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채 바로 앞에 있는 150년 역사의 칼튼 호텔이 2014년 정부군의 공격으로 모두 폭파되면서 알레포 성채도 이같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급기야 2015년 7월 12일 반군에 대한 공세 과정에서 정부군이 성채 아래에 설치한 폭탄으로 성벽 일부가 붕괴됐지만 성채는 2017년 초 손상된 곳을 수리하고 재개장했다.


시리아는 알레포 성채가 있는 알레포 구시가지를 비롯해 다마스쿠스 구시가지, 무디크 성채, 크락 데 슈발리에, 보스라 구시가지, 팔미라, 아파메아 등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시리아 내전으로 인류의 문화유산은 위기에 처해 있다. 인류가 건설한 문명을 스스로 파괴하는 전쟁사가 오늘도 반복되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20년 1월 6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200106/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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