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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Feb 18. 2020

피의 일요일·독소전쟁 지켜본 ‘러시아 문화 상징’

<27>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러 옛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
예카테리나 2세 때 모습 갖춰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혀

 
레닌그라드 공방전 땐 100만 점 피난
일부 소장품은 수탈 당하기도
직원들 굶주림 견디며 박물관 사수
 
                                                        

에르미타주 박물관 전경. 사진=blog.parkinn.com.


러시아의 옛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이곳은 고대 이집트와 스키타이 황금 유물,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품을 비롯해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전체 소장품이 270만 점에 달하며 전시실은 1050개나 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앞 광장에서 1905년 ‘피의 일요일’과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났다. 독소전쟁 당시 벌어진 레닌그라드 공방전으로 100만 점의 소장품을 피난 보냈으며 남겨진 소장품은 나치 친위대에 의해 수탈당했다.

1945년 5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의 베를린으로 진격해 잃어버린 소장품뿐만 아니라 나치가 전쟁에서 모은 220만 점의 문화재를 가져와 이곳을 비롯한 러시아의 여러 박물관·미술관에 보관했다. 이후 150만 점은 1949년 동독에 반환했지만 나머지 70만 점은 아직도 러시아에 있다.

1762년 완성된 겨울궁전이 시초

1712년 표트르 대제(1672~1725)는 러시아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1754년 표트르 대제의 딸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1709~1761)가 겨울을 지내기 위한 거처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려 1762년 이탈리아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겨울궁전을 완성했다. 그러나 옐리자베타는 겨울궁전이 완성되기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1766년 러시아 화가 알렉세이 안트로포프(Aleksey Antropov)가 그린 예카테리나 2세의 초상화. 사진=트베리 지역 미술관

예카테리나 2세의 미술품 수집으로 박물관 변모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의 사후에 예카테리나 2세(1729~1796)가 1762년 6월 28일 친위 쿠데타로 왕위를 차지하고 겨울궁전의 주인이 됐다. 그녀는 당시 갤러리조차 없었던 문화 불모지 러시아에 유럽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 역사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1764년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를 방문한 베를린의 상인 요한 고츠코스키로부터 루벤스·렘브란트 등의 작품을 포함한 225점을 사들였는데 이때를 박물관의 공식 설립 연도로 본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구입한 명화들을 조용히 감상하기 위해 겨울궁전 앞에 작은 별관을 지었는데 이 별궁을 ‘에르미타주(Hermitage·프랑스어로 은둔처를 뜻함)’라고 불렀던 것이 박물관의 현재 명칭이 됐다.


예카테리나 2세는 통치 기간에 4000여 점의 작품을 이곳에 수집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1863년부터 국민에게 공개했는데 소(小)에르미타주, 구(舊)에르미타주, 신(新)에르미타주, 에르미타주 극장, 겨울궁전 등의 5개 전시실과 1개의 예비 보관소로 구성돼 있다. 3층 높이로 1050개의 방과 1786개의 문, 1945개의 창문이 있으며 총면적은 4만6000㎡(1만3915평)에 달한다. 176개 바로크 양식 조각상으로 지붕을, 로코코 양식의 녹색과 흰색으로 외관을 꾸몄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전경. 사진=픽사베이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1917년 병원으로 쓰여


박물관이자 궁전이었던 에르미타주는 20세기 초 러시아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겨울궁전 앞에 있는 궁전 광장에서 1905년 1월 노동자들의 평화적 시위 행렬에 황실 군대가 무차별 공격을 가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러시아 왕조의 몰락과 소련 탄생의 계기가 됐다.


에르미타주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인 1915년 10월부터 1917년 11월까지 병원으로 쓰였다. 비어있는 각 방들은 환자실과 수술실로 변했다. 박물관의 소장품들은 안전을 위해 모스크바로 보내졌다가 1921년에 이르러서야 반환됐다.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레닌그라드로 지명이 변경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촬영된 에르미타주 박물관 내부. 사진=zoyalais.co.vu


레닌그라드 공방전으로 소장품 피난


독소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소련이 벌인 전쟁(1941∼1945)이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대규모로 침공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전쟁은 1945년 5월 9일 소련이 베를린을 함락시킬 때까지 약 4년간 지속됐다.


독일은 병력을 크게 세 갈래로 나눠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우크라이나 등의 경로로 소련에 침입했다. 전쟁 초기 에르미타주의 직원들과 수백 명의 시민들은 소장품을 대피시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고 100만 점 이상의 예술품들을 두 대의 특별열차로 우랄산맥 인근 스베르들롭스크로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촬영된 에르미타주 박물관 내부의 모습. 사진=zoyalais.co.vu


하지만 에르미타주 예술품을 이동시킬 세 번째 열차가 준비되고 있을 때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포위했고 더 이상 작품을 이동시킬 수 없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1941년 9월 8일부터 1944년 1월 27일까지 872일간 벌어졌는데 독일군의 포위로 인해 러시아 시민들의 식량 부족이 야기됐다. 에르미타주의 직원들은 굶주림으로 죽어가면서도 박물관을 지켰다.


어릴 적부터 화가를 꿈꿔 오스트리아 빈의 예술아카데미에 두 번이나 지원한 적이 있는 히틀러는 전쟁이 끝나면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린츠에 박물관을 세우고자 나치에 문화재 수집 특수부대 ERR를 조직해 유럽 전역과 서아프리카 등의 전장에서 500만 점에 이르는 문화재를 약탈했다.


나치 친위대는 레닌그라드를 포위했을 때 에르미타주의 소장품 역시 약탈했다. 하지만 1945년 독일을 점령한 소련의 붉은 군대는 빼앗긴 소장품뿐만 아니라 베를린에 보관돼 있던 회화, 조각, 귀금속 장신구, 고대 유물 등 예술품 20만 점과 고서 약 200만 점을 본국으로 가져갔다. 종전 후 스베르들롭스크에서 두 열차가 작품들을 싣고 에르미타주에 도착했고 1945년 11월 박물관은 재개관했다.


1949년 동독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소련은 양국의 우호 관계를 다지는 차원에서 제2차 세계대전 때 약탈해온 문화재 약 150만 점을 반환했다.


하지만 고대 트로이의 황금과 보석 장신구 등의 핵심 유물들과 독일에 권원(어떠한 행위를 법률적으로 정당화하는 근거)이 없는 유물들은 아직 에르미타주를 비롯한 여러 러시아 박물관에 남아 있다. 지난 2013년 6월 21일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열린 ‘청동시대: 국경 없는 유럽’ 전시회를 찾아가 문화재 반환을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러시아 문화의 상징으로 오늘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12월 30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1230/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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