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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Feb 17. 2020

워싱턴의 가장 높은 곳에서 조지 워싱턴의 소원을 꿈꾼다

26> 미국의 워싱턴 기념탑

미국 초대 대통령 기념탑
169.2m 오벨리스크 형식
30년 우여곡절 겪다 완성
고도제한 고층건물 막아

                                                        

워싱턴 기념탑 전경. 사진=픽사베이.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가장 높이 하늘로 솟아 있는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은 미국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미국 독립전쟁(1775~1783)에서 영국에 승리한 후 1783년 파리조약으로 독립했다. 이 탑은 미국 독립전쟁의 총사령관이자 미국을 건국한 조지 워싱턴(1732~1799)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1848년부터 건축했는데 자금 부족과 미국 남북전쟁(1861~1865)으로 중단됐다가 1884년에서야 완성됐다. 


169.2m 높이로 워싱턴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이 탑은 동쪽으로 국회의사당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서쪽으로 링컨 기념관과 알링턴 국립묘지, 남쪽으로 펜타곤과 제퍼슨 기념관, 북쪽으로 백악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건립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으나 1889년 에펠탑이 지어지면서 이를 추월했으며 기념탑으로는 1982년 북한의 평양에 1m 더 높은 170m의 주체사상탑이 세워지면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 됐다.


워싱턴 기념탑 전경. 사진=픽사베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


아메리카 대륙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된 후 유럽의 여러 국가에 식민 지배를 당했다. 18세기 유럽을 비롯해 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 등을 전장으로 한 7년 전쟁(1756~1763)의 하나로 영국과 프랑스가 북아메리카 오하이오 강 주변의 인디언 영토를 둘러싸고 식민지 쟁탈전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5~1763)을 벌였다. 조지 워싱턴은 이 전쟁에 참전해 버지니아 군대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프랑스군에 맞섰다. 1759년 9월 퀘벡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북아메리카 동쪽 절반을 식민지로 차지했다. 영국은 이곳을 13개 지역으로 나눠 다스리면서 전쟁으로 부족해진 영국 내부 재정을 메우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매겼는데 이것이 북아메리카인들의 큰 반발을 사는 계기가 됐다. 


1773년 12월 보스턴 항에 정박해 있던 영국 배에 실린 홍차 상자 342개를 모두 바다에 던져 버리는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한 후 1774년 영국 의회가 보스턴 항구 폐쇄 등을 내용으로 하는 법을 통과시키자,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는 제1차 대륙회의를 소집했다. 다음 해 열린 제2차 대륙회의에서 북아메리카인들은 조지 워싱턴을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영국에 대항해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을 일으켰다. 


1776년 7월 4일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는 독립선언을 발표해 독립 의지를 알렸다. 조지 워싱턴은 훈련받지 못한 군인들과 군수 물자 부족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북아메리카인들을 결집시켜 영국군에 대항했고 결국 1781년 10월 요크타운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원조를 받아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전쟁을 종결시켰다. 영국은 1783년 파리 회의에서 미국 식민지 내 13개 주의 독립을 인정했다.


북아메리카인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한 조지 워싱턴을 1789년 4월 30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새로운 국가인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을 세웠다. 1791년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프랑스의 건축가 피에르 랑팡에게 새 수도 건설 설계를 의뢰해 워싱턴DC(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가 세워졌다. 도시의 이름은 조지 워싱턴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성을 따서 지었다. 조지 워싱턴은 탁월한 리더십을 선보이며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데 일조했으며 두 번의 대통령직을 마치고 물러났다.


1796년 길버트 스튜어트가 그린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사진=클락 미술관


1848년 7월 4일 첫 공사 시작


1833년 미국의 네 번째 대통령을 지낸 제임스 매디슨과 대법원장 존 마셜이 민간단체인 워싱턴국립기념탑협회를 창설해 세계에서 유례없는 초대 대통령의 기념탑 건립을 추진했다. 1836년 기념탑 설계 공모전이 열렸다. 둥근 도리스식 주랑 위에 오벨리스크(Obelisk: 고대 이집트 왕조에서 태양신을 기리며 세운 기념비 또는 방첨탑)와 말 탄 조지 워싱턴의 조각상을 세우는 안을 제시한 로버트 밀스의 설계가 1845년 선정됐다. 1848년 4월 11일 자금 부족으로 오벨리스크만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그해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워싱턴 기념탑의 주춧돌이 놓였다. 그러나 1854년 기념탑이 46.3m 높이에 도달했을 때 기부금이 떨어지면서 공사가 중단됐다. 이는 워싱턴국립기념탑협회의 위원회 선거에서 반대파가 집권하면서 협회 운영에 차질을 빚은 것이 한몫했으며, 로버트 밀스마저 1855년 세상을 떠났다.


1820년 존 트럼 불이 그린 요크타운 전투에서의 ‘콘월리스의 항복’(Surrender of Lord Cornwallis). 사진=미국 국회 의사당 소장


남북전쟁으로 공사 중단됐다가 1876년부터 재개


건설이 중단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미국 남북전쟁(1861~1865)이 발발했다. 미국 북부는 공업지대였고 남부는 농업지대였다. 남부에서는 목화 농사를 짓기 위해 노예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북부는 노예제도를 반대하며 이에 뜻을 같이하는 링컨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에 남부 7개 주가 남부 연합을 만들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링컨은 영국의 개입을 없애고자 남부의 바닷길을 막고 전쟁을 시작했다. 4년에 걸친 격전 끝에 북부가 승리했고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가 폐지됐다.


기념탑 건설은 1854년부터 1876년까지 22년 동안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전쟁이 끝난 후 10여 년이 흐르고 사회가 안정화된 가운데 1876년 7월 4일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에서 의회는 공사를 재개하기 위해 2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의회가 충분한 자금을 제공하기로 하자 당시 미국의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은 미 육군 공병대의 토머스 케이시 중령에게 공사를 완료하라는 지시를 내려 기념탑 건립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워싱턴 기념탑 전경. 사진=픽사베이.


1884년 완성해 1988년부터 일반에 공개


1884년 12월 6일 꼭대기에 높이 22.86㎝, 무게 2.83㎏인 알루미늄으로 된 모퉁이돌(건물 모퉁이에 놓여 벽을 지탱해주는 큰 주춧돌)이 설치되면서 기념탑이 완성됐다. 조지 워싱턴의 탄생일을 하루 앞둔 1885년 2월 21일에 헌정됐다. 이 탑은 높이 152.4m의 기념비에 높이 16.8m의 상단 피라미드를 더해 총 169.2m이다. 약 3만6000개의 화강암과 대리석 벽돌로 이뤄져 있다. 30년 넘는 기간에 걸쳐 공사를 하면서 동일한 건축자재를 구하지 못해 처음 지어진 하단과 나중에 지어진 상단의 색깔이 다르다. 


워싱턴 기념탑은 1988년 10월 9일부터 일반 관람객에게 개방됐다. 다음 해 50m 높이의 12층 건물인 카이로 아파트가 워싱턴에 들어서자 더 많은 고층 건물이 건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회는 건물 고도 제한법을 통과시켜 워싱턴에 지어지는 어느 건물도 88m 높이의 국회의사당보다 높게 짓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이로 인해 워싱턴 기념탑은 워싱턴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 됐다. 


이 탑은 2011년 진도 5.8 규모의 버지니아 지진으로 150개가 넘는 균열이 발생한 이후 재건을 위해 2014년까지 폐쇄됐다. 2016년 9월 엘리베이터 안전 문제로 폐쇄됐다가 올해 9월 19일 재개장했다. 조지 워싱턴은 생전에 “나의 첫 번째 소원은 인류의 역병인 전쟁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지만 도리어 미국은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초강대국으로 우뚝 섰다. 위싱턴 기념탑은 이를 기념하듯 오늘도 워싱턴에서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12월 23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1223/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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