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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Apr 27. 2020

‘프라하 성 창밖 투척사건’… 30년 전쟁 도화선

<41> 체코의 프라하 성

가톨릭 강요했던 합스부르크 왕가
사절 3명 프라하 성으로 보냈지만
보헤미아 귀족들이 창밖으로 내던져
30년 전쟁 주요 원인 중 한 사건 꼽혀 

 
15세기에도 종교 전쟁에 휘말리고
2차 세계대전 땐 나치 본부 쓰이기도
현재 대통령 집무실·영빈관으로 사용 


프라하 성 전경. 사진=tripsavvy.com

                                              

체코의 수도 프라하를 가로지르는 블타바 강의 서쪽 언덕에 있는 프라하 성(Prague Castle)은 세계의 유명한 성 중 하나다. 이곳의 규모는 길이 570m, 폭은 130m, 전체 면적 7만㎡(2만1175평)에 달하며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합돼 있다. 이 성은 9세기 말부터 지어져 14세기에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갖췄다.


프라하 성에는 종교와 관련된 전쟁사가 있다. 15세기 종교 개혁으로 촉발된 후스 전쟁(1419~1434)으로 약 50년간 방치됐다가 보헤미아(체코의 옛 지명)의 왕궁으로 쓰였다. 1618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보낸 가톨릭 사절 3명을 성의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30년 전쟁(1618~1648)의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성 내에는 왕궁, 대통령 관저, 요새 건물, 정원, 황금 소로를 비롯해 성비투스 대성당·성조지바실리카 성당·성십자가 교회 등과 성조지 수도원이 있다.


익명의 화가에 의해 그려진 카를 4세의 초상화.사진=www.liveinternet.ru


9세기부터 세워진 도시 프라하, 체코어로 ‘문턱’ 의미


체코어로 ‘문턱’을 뜻하는 프라하의 역사는 9세기 말 블타바 강에 자리 잡은 제방(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한 성토 구조물)에서 시작한다. 프라하 성은 프르제미슬 왕조의 보르지보이 1세(852~889)가 880년경부터 세웠다. 목조 건물에다 진흙과 돌로 된 단순한 성벽으로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에 둘러싸여 있었다. 프라하 시가지는 강을 따라 확장됐다. 10세기에 주변으로 점차 구역이 확장되면서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가 됐다.


12세기 들어 프라하 성은 한층 더 강화됐다. 1135년 소베슬라프 2세(1128~1180)가 기존 목재 구조를 대체하는 거대한 석조 성을 건설하기 시작해 당시 전 유럽에 유행하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으로 개축됐다.


프라하 성이 번성한 시기는 룩셈부르크 왕조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카를 4세(1316~1378)가 통치하던 14세기 중반이다. 왕궁은 고딕 양식으로 장대하게 개축됐으며 성곽은 강화됐다. 카를 4세의 아들인 바츨라프 4세(1361~1419)의 통치 기간에 2개의 수직 별관이 증축됐으며 모든 성인들의 예배당이 재건됐다.


후스전쟁의 발단이 된 1415년 7월 종교 개혁가 얀 후스의 화형. 사진=www.lentmadness.org


1419년 제1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 계기로 벌어진 후스전쟁에 휘말린 프라하 성 


하지만 프라하 성의 번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5세기 초 후스전쟁(1419~1434)에 휘말리면서 약 50년간 방치된다. 종교 개혁자 얀 후스(1372~1415)가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15세기 전반 ‘개혁 회의’라 불리는 일련의 종교 회의)에 소환돼 다음 해 화형된 후, 보헤미아 전역은 농민과 하층 시민들이 중심이 된 후스파(얀 후스의 이름을 딴 집단명)의 종교 개혁 목소리가 거셌다.


15세기 그려진 후스파 전쟁 당시 후스파(왼편)와 십자군(오른편)의 전투 장면. 사진=readtiger.com


1419년 7월 30일 급진 후스파 군중들이 시청사를 습격하고 프라하 시 평의원 7명을 창밖으로 내던져 죽인 제1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 벌어졌다. 충격을 받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 바츨라프 4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지기스문트(1368~1437)는 교황 마르티누스 5세(1368~1431)와 함께 10만 명의 십자군을 보내 후스파를 토벌하려고 했다. 하지만 후스파의 지도자였던 얀 지슈카(1360~1424)의 뛰어난 지략에 막혀 1420년부터 1431년까지 5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러나 후스파는 내부 분열을 일으킨 후, 1434년 온건 후스파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연합해 급진 후스파를 꺾으면서 전쟁은 종료됐다. 1436년 이그라우 협정에 의해 후스파는 보헤미아 국왕과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는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후스파 전쟁 이후 수십 년간 성에 귀족이 거주하지 않게 되자 내성 건물과 외곽이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한 혼란이 지나간 후 1483년 야기에우워 왕조의 브와디스와프 2세(1351~1434)가 프라하 성을 관저로 선택하면서 대규모 재건축 작업을 시작했다. 새로운 방벽과 함께 북쪽의 방어탑이 건설됐으며, 위풍당당한 모습의 블라디슬라프 홀이 탄생했다.


1618년 가톨릭을 강요하려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저항한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온 가톨릭 사절 3명을 프라하 성에서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사진=providencem


1618년 프라하 성에서 제2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

17세기 프라하 성에서 제2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 벌어지며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1618년 5월 23일 가톨릭을 강요하려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저항한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온 가톨릭 사절 3명을 프라하 성의 창문 밖으로 내던졌으며, 독립 정부를 수립했다. 이 사건은 30년 전쟁이 벌어지게 된 주요 원인 중의 하나였다. 1620년 11월 8일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1559~1632)가 이끄는 신성로마제국과 가톨릭 동맹의 군대는 백산 전투에서 안할트-베른부르크 공 크리스티안 1세(1568~1630)가 이끄는 보헤미아 군대에 참패를 안겼다. 30년 동안 벌어진 전쟁 기간에 프라하 성은 손상되고 약탈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신성로마제국은 프라하를 점령하고 가톨릭을 다시 강요했다. 보헤미아는 1627년 독립왕국의 지위를 잃고 오스트리아의 속국이 됐으며, 합스부르크 왕가가 왕위를 차지했다.


프라하 성 전경 사진. 사진=픽사베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체코가 독일에 항복, 프라하 성은 나치 본부로 쓰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던 보헤미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이 가까워진 1918년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가로 독립했다. 프라하 성이 대통령 관저로 쓰이면서 체코의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주목받게 됐다. 프라하가 유럽의 다른 도시와 달리 문화유산이 많은 이유는 나치 독일에 항복해 제2차 세계대전을 피했기 때문이다. 1939년 3월 15일 베를린에서 열린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체코의 에밀 하하 대통령은 보헤미아와 모라바를 독일에 넘겨준다는 내용의 조약에 서명했다. 다음 날인 3월 16일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후, 히틀러는 프라하 성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1945년 종전 전까지 프라하 성은 나치의 본부로 쓰였다.

1993년 1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된 후, 이 성의 일부를 현재 대통령 집무실과 영빈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 2018년에는 체코 건국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가 프라하 성에서 열렸다. 1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프라하 성은 오늘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매년 약 18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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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국방일보 2020년 4월 13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200413/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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