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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May 06. 2020

내전의 무게에 무너진 다리 화해의 강 다시 잇는 다리로

<43>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스타리 모스트

이슬람 보스니아-가톨릭 헤르체고비나
다민족·다종교·다문화 공존의 상징물
오스만 제국 술탄 술레이만 1세 때 착공
보스니아 내전서 크로아티아 군이 파괴
세계 각국의 지원 받아 2004년에 복원

                                                       

스타리 모스트 전경. 사진=www.thedailybeast.com


지중해와 흑해 사이에 있는 발칸반도는 고대부터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이곳에는 종교와 문화가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는 만큼 갈등과 분쟁이 그치지 않아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린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남서쪽으로 130㎞ 떨어져 있는 모스타르에는 전쟁의 파괴와 복원을 상징하는 다리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가 있다. 이곳은 보스니아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1566년에 건설됐다. 보스니아의 역사를 감싸고 있는 이 다리 아래로 네레트바 강이 흐르며, 다리를 사이에 두고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와 가톨릭을 믿는 헤르체고비나가 있다. 스타리 모스트는 보스니아 내전(1992~1995) 때 크로아티아 군의 포격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전쟁이 끝난 후 세계 각국의 후원금과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2004년 복원됐다.  


1530년경 익명의 화가에 의해 그려진 오스만 제국의 술탄 쉴레이만 1세 초상화. 사진=빈 미술사 박물관


세계서 가장 긴 아치형 다리…이슬람 건축의 걸작

모스타르는 15~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전초 기지로 건설된 도시이다. 스타리 모스트는 1557년 목조 다리를 대체할 석조 다리를 건립하라는 술탄 술레이만 1세(1494~1566)의 명에 따라 건축가 미마르 하이레딘에 의해 9년에 걸쳐 지어졌다. 길이 30m, 폭 5m, 높이 24m에 달하는 크기로 1566년 완공됐을 당시에 단일 구간을 연결한 세계에서 가장 긴 아치형 다리로 이슬람 건축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스타리 모스트와 모스타르는 다리 양쪽 끝에 건설됐던 탑과 통행을 지키던 오스만 제국 군의 이름인 모스타리(Mostari·다리의 수호자)에서 유래했다. 다리의 북동쪽에는 할레비야 탑, 남서쪽에는 타라 탑 등이 있어 요새 역할을 했다.


제1대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던 티토. 사진=www.taringa.net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된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성, 79년 뒤에 보스니아 내전 발발

보스니아는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점령됐으며 이후 1908년 강제 합병됐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오스트리아 군을 격려한 후에 사라예보에 있는 라틴 다리를 지나던 도중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쏜 총탄에 쓰러지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1918년 1차 대전 종전 후 보스니아는 다민족 국가인 베오그라드 왕국(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로 이뤄진 나라)의 영토에 편입됐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1892~1980)가 주축이 돼 왕정을 폐지하고 보스니아를 비롯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등 6개 공화국이 모인 사회주의 형태의 유고슬라비아 연방(이하 유고)이 탄생했다. 각 공화국에 자치권을 부여한 티토는 유고의 첫 대통령으로 정치적 민족주의를 제창하며 다민족, 다종교로 구성된 공화국 간 갈등을 무마시켜 왔다. 그러나 1980년 5월 4일 티토가 87세의 나이로 영면하면서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정치세력들을 원만히 중재하던 정치 지도력 역시 사라지게 됐다. 이로 인해 유고는 그동안 잠재된 민족 갈등이 악화되면서 분리 독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보스니아 내전 중 폭격을 입은 스타리 모스트. 사진=twoupriders.com


‘민족청소’ 대량 학살 자행된 유고 내전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1941~2006)가 1989년 유고의 새 대통령이 되면서 유고 내전의 조짐이 됐다. 게다가 같은 사회주의를 표방한 소련의 붕괴가 점차 다가오자 유고의 각 공화국들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했다. 2일 뒤인 6월 27일 유고 군이 이들의 독립을 막기 위해 슬로베니아를 침공한 뒤에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등지로 싸움터를 옮겨가면서 유고 내전(1991~2001)이 벌어졌다.


보스니아 내전(1992~1995)은 자그레브를 중심으로 한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연합하고, 유고 군을 중심으로 한 세르비아인이 맞서면서 발발했다. 세르비아의 지도자들이 인종 분리 정책을 펼치기 시작해 ‘민족청소’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유고 내전 중 가장 참혹한 전쟁이 됐다. 20만 명 이상이 희생되고, 23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보스니아 내전은 1995년 12월 스르프스카 공화국이 보스니아에 합병됨으로써 일단락됐다.


보스니아 정부, 국가적 애도의 날 선포


유럽을 휩쓴 여러 번의 전쟁 속에서도 건재했던 스타리 모스트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 포병대에 의해 파괴된다. 한때 동지였던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은 적으로 만났다. 화력에서 우세했던 크로아티아군은 모스타르를 무려 9개월간 포위했다. 크로아티아군은 모스타르의 서쪽을, 보스니아 군은 동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1993년 11월 9일 크로아티아 군은 60여 발의 포격으로 스타리 모스트를 파괴했는데, 당시 성명에서 “전략적 필요에 의해 일부러 파괴했다”고 자인함으로써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됐다. 다리가 파괴됐다는 소식이 사라예보에 전해지자, 보스니아 정부는 사라예보 역시 포위 공격당한 상태였음에도 국가적 애도의 날을 선포했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파괴된 후 재건 작업이 진행 중이던 2003년 6월에 촬영된 사진. 사진=readtiger.com


2001년 파괴된 다리 복원 시작


내전이 종식되자 문화와 종교가 다른 민족 간 화해와 연결의 상징물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알려진 스타리 모스트를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유네스코에 의해 설립된 국제과학위원회의 기부와 세계 각국의 지원을 받아 다리의 복원이 시작됐다. 헝가리 잠수부들은 파괴된 후 강에 수장된 다리의 파편들을 건져 올렸다. 터키의 건축가들은 1088개의 석재 파편을 꼼꼼히 재배치해 완벽하게 복원해냈다. 복구는 2001년 6월 7일에 시작돼 2004년 7월 23일에 완료됐다. 복원을 마친 준공식 자리에는 세계 10개국 정상과 영국의 찰스 황태자,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이 참석해 보스니아의 평화를 기원했다.


스타리 모스트 전경. 사진=www.tkh.ba


스타리 모스트는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다리 입구에는 참혹한 내전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세운 ‘보스니아 내전을 잊지 말자(Don’t forget)’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7월 말 다리 아래로 뛰어내리는 다이빙 대회가 개최되는데, 1664년 사람들이 여가활동으로 다리에서 네레트바 강으로 처음 뛰어내린 이후 1968년부터 공식대회를 열었다. 전쟁은 20여 년 전에 끝났지만 상흔은 여전히 남아 있다. 스타리 모스트는 내전의 아픔을 기억하며, 오늘도 사람들을 잇고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일깨운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20년 4월 27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200427/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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