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아트 May 08. 2020

무굴 ‘영광’ 세포이 ‘항쟁’ 간직한 독립성지

<44> 인도의 붉은 요새

무굴제국 샤 자한 1648년 완성
이슬람·티무르·힌두 양식 등 혼합
인도독립전쟁 때 많은 부분 파손
독립선포 등 인도 상징적 장소 각인 


붉은 요새 전경. 사진=www.tripsavvy.com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 있는 붉은 요새는 세포이 항쟁, 독립 선포 등 인도의 역사와 함께한 건축물이다.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인 타지마할을 지은 무굴제국의 샤 자한이 1648년 완성한 이 요새는 붉은 사암으로 지은 성벽 때문에 인도어로는 ‘붉은 성’을 뜻하는 ‘랄 킬라(Lal Qila)’, 영어로는 ‘레드 포트(Red Fort)’라고 불린다. 


붉은 요새는 19세기 세포이 항쟁 때 크게 파괴됐으며, 영국 식민지 시대에 영국군의 요새로 쓰였다. 인도 초대 총리인 네루는 1947년 붉은 요새에서 독립 기념 연설을 하면서 인도의 독립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곳은 2016년 말에 발행된 인도의 500루피 화폐 뒷면에 그려져 있을 만큼 인도에서 중요한 건물이다.


인도의 화가 페이아그에 의해 1630년 그려진 샤 자한의 초상화. 사진=www.metmuseum.org


17세기 무굴제국의 샤 자한에 의해 건설

무굴제국은 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인도 북부를 통치한 이슬람 왕조다. 무굴은 튀르크어로 ‘몽골’을 뜻한다. 몽골 후손인 티무르의 5대손 바부르(1482~1530)가 300년 이어진 델리 술탄 왕조를 몰아내고 무굴이라는 새 왕조를 세웠다.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 샤 자한(1592~1666)은 수도를 아그라에서 샤 자하나바드(Shah Jahanabad·지금의 올드 델리)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1638년 5월 12일 건축가 우스타드 아흐메드 라호리로 하여금 붉은 요새를 짓도록 한다.

궁전과 저택, 왕실 목욕탕, 정원 등으로 구성된 붉은 요새는 10년 뒤인 1648년 완공됐다. 모양은 팔각형이며 길이는 대략 900m, 너비는 550m다. 야무나 강을 따라 건설된 성벽의 전체 길이는 2.5㎞에 달하며, 높이는 강 쪽이 16m, 도시 쪽은 33m다. 무굴제국의 독창적인 건축 기술에 이슬람·티무르·페르시아·힌두의 양식이 혼합됐다. 요새에는 라호르 문과 델리 문 등 두 개의 출입구가 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붉은 요새의 수난

부왕인 샤 자한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아우랑제브(1618~1707)는 90세까지 50년간 통치하면서 선대의 관용정책을 무시한 데 이어 비이슬람 교도에 대한 인두세(사람의 머릿수에 맞춰 내는 세금)를 부활시켰다. 또 시크교 지도자를 잡아 처형하고 힌두교도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30년이 넘는 세월을 소진하면서 무굴제국이 몰락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18세기 중엽 무굴제국은 결국 페르시아와 아프간 세력에 의해 세력이 약해져 소국으로 전락했다. 1747년 이란 아프샤르 왕조의 나 디르 샤(1688~1747)가 무굴제국을 정복하던 시기에 붉은 요새의 예술품과 보석을 약탈했다.


붉은 요새 전경. 사진=www.dfordelhi.in


1757년 플라시 전투 승리로 인도 지배 시작한 영국

유럽 열강은 신항로를 개척하면서 향신료와 면직물이 많이 생산되는 인도를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동방무역을 위해 인도에 진출한 영국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는 인도 벵골 지방의 패권을 둘러싸고 시라지 웃다울라(1733~1757)와 1757년 플라시 전투를 벌였다. 웃다울라가 프랑스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영국은 이 전투에서 이겨 인도 지배의 발판을 놓았다.

1764년 북사르 전투에서 무굴제국의 샤 알람 2세(1728~1806)에게 승리한 동인도회사는 벵골·비하르·오디샤 등에 대한 징세권(정부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권리)을 얻게 됐다. 동인도회사는 그 이후에도 뭄바이와 마드라스를 기반으로 인도 각지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했다. 영국-마이소르 전쟁(1767~1799)과 영국-마라타전쟁(1775~1818)에서 영국이 계속 승리하면서 동인도회사는 나르마다 강 이남의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인도의 500 루피 지폐의 앞면에는 간디, 뒷면에는 붉은 요새가 그려져 있다. 사진=www.india.com


영국 식민 시기 때 영국군 요새로 사용돼

19세기 중엽 인도 전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동인도회사는 인도인을 세포이(Sepoy·페르시아어로 병사라는 뜻)라는 용병으로 고용하고 자체적인 군대를 편성해 인도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1857년 5월 10일 델리 근교의 소도시 메루트에서 세포이들이 영국 민지 지배에 대항하는 항쟁을 일으켰는데, 세포이 항쟁 또는 제1차 인도독립전쟁(1857~1859)이라고 불린다.

처우에 대한 불만과 힌두교·이슬람교도가 거부하는 소·돼지기름을 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 탄약통에 바른 것이 원인이 돼 세포이들의 항쟁이 시작됐고 각계각층의 반영국 민족 운동으로 발전했다. 반영국 독립전쟁의 양상을 띠었으나 결국 영국군에 의해 진압됐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해산하고 영국 국왕이 인도를 직접 통치했다.

붉은 요새는 세포이 항쟁 때 많은 부분이 파손된다. 1857년 9월 14일 니컬슨 중장이 이끄는 영국군은 60문의 중포로 붉은 요새의 성문을 파괴하고 성을 점령했으며, 다음 날인 9월 15일 무굴제국의 마지막 왕인 바하두르 샤 2세(1775~1862)를 체포한 후 1858년 재판을 통해 양곤으로 추방했다. 이로써 무굴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영국군이 붉은 요새 주변의 건물과 정원 등을 철거하면서 3분의 2 이상의 건물이 파괴됐다. 또한 영국군은 요새에 있던 귀중품을 약탈해 개인 수집가와 대영박물관, 대영도서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팔아넘겼다. 영국 식민 시기 때 붉은 요새는 영국군의 요새로 쓰였다.

                    

1947년 8월 15일 붉은 요새에서 인도의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는 독립 기념 연설과 국기 게양식을 개최했다. 사진=indianexpress.com


1947년 8월 15일 인도 독립 때 네루 총리 독립 기념 연설 진행

세포이 항쟁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를 통해 인도인들은 민족의식을 키우게 된다. 세포이 항쟁이 끝나고 88년 뒤 인도가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붉은 요새는 독립을 알리는 공식 행사의 장소로 선정됐다. 1947년 8월 15일 인도의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붉은 요새에서 독립 기념 연설을 하고 국기 게양식을 개최했다. 이후 이곳은 매년 인도독립기념일(8월 15일)에 총리가 국기를 들어 올리고, 인도공화국의 날(1월 26일)에는 대통령이 국기를 들어 올리는 상징적인 장소가 됐다. 붉은 요새는 무굴제국의 영광과 세포이 항쟁을 기억하며 오늘도 인도의 역사를 새로이 기록해가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20년 5월 4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200504/1/BBSMSTR_000000100082/view.do



매거진의 이전글 내전의 무게에 무너진 다리 화해의 강 다시 잇는 다리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