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사람, 돌아온 로댕

메멘토 모리

by 재희

1917년에 죽은 로댕은 1909년에 태어나셨던 우리 할아버지와 동시대를 살았다. 막연한 옛날 사람이 아닌 느낌이다. 프랑스 조각가로서 '생각하는 사람'이라 이름한 그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잘생겼나? 여자를 좋아했다던데, 매력이 있어 보이기도 하네. -나무위키

오른손을 왼쪽 무릎에 얹은 불편한 자세.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으려 온 몸의 근육이 긴장하고 있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버티며 사는 인생의 처연함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것처럼 느껴진다.



지옥의 문 앞에서 생각하는 사람


지옥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영감을 받은 '지옥의 문' 앞에서 지옥에 떨어진 인생들을 바라보고 있는 띵커. 그는 단테이고, 로댕이며, 나와 당신이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작업하면서 단테의 신곡을 거듭해서 읽었다. 머리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를 스케치해보고, 지우고, 다시 그려보았다. 지옥의 문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날에 조각한 작품이다. 생의 마지막이 그를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메멘토 모리. '너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짧은 프레이즈가 그의 마음을 조각했다. 조각을 구상하고, 끌을 들어 한 번, 한 번 다듬을 때마다 마음을 사정없이 때렸다. 동네에 있던 천국의 문을 본따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지옥의 문, 스케치.


난봉꾼의 고뇌

로댕은 정부가 있었다. 춥고 배고팠던 시절.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그를 지지해준 여인이 있었다. 그에게 나타난 젊은 여자, 카미유 클로델. 19살 때 만나 20살 때부터 조수로 그의 작업실에 들어온다. 44살 로댕은 그 어린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이것은 노망인가. 지랄인가. 예술가의 식지 않은 젊음인가.



그대는 나에게 활활 타오르는 기쁨을 준다오. 내 인생이 구렁텅이로 빠질지라도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겠소. 당신의 그 손을 나의 얼굴에 놓아주오. 나의 살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나의 가슴이 신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 로댕의 소위 연애편지



카미유 클로델. 눈빛이 묘해.


자기 인생이 구렁텅이로 빠져도 후회하지 않겠다 달콤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그는 지옥의 구렁텅이를 보았다. 그는 그가 본 것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지옥을 내려보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은 원래 단테였는데, 지금은 로댕 자신이 된 것만 같았다. 사랑이 먼저였는데. 에라 모르겠다. 오랜 연인을 떠나, 자신의 뮤즈가 되어준 카미유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었는데, 메멘토 모리가 계시처럼 다가왔다. 카미유가 자신을 묘하게 바라봐주고, 늙은 그의 몸을 만져줄 때, 호르몬이 팍팍 돌았나보다. 살아있음을 느꼈겠지. 황홀하고 좋았을 것이다. 호르몬이 원래 그렇다. 인간은 호르몬의 노예니까. 그녀를 껴안고 있던 두 손을 풀고, 조각할 정을 붙잡는다. 메멘토 모리. 다시 죽음을 생각한다. 마음에 그린 지옥을 조각한다. 절망 자체인 지옥을 묘사한다. 희망이 있으면 안된다. 봐주는 게 하나도 없어야 한다.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진 지옥 불을 생각한다. 지옥에서 괴로워하는 인간을 한명 한명 조각하는데, 너무 잘한다. 자신이 생각해도 조각을 너무 잘한다. 천재였네. 절망이 자기 손 끝에서 뚝뚝 묻어난다. 절망. 절망. 절망. 지옥. 지옥. 지옥.

지옥. 절망.


이제 지옥의 가장 아래를 조각할 차례다. 키스하려는 두 남녀. 파울로와 프란체스카. 아름다운 프란체스카는 절름발이 남편을 두고, 멋진 시동생과 사랑에 빠졌다. 그를 만지고 싶고, 그와 입맞추고 싶었다. 절름발이 형이 이런 아름다운 여자를 가지는 것이 몹시 질투나 형의 아내가 될 사람을 내 여자로 만들었다. 조각된 모습과 같은 로맨틱한 키스 후에 그들은 형에게 발각되어 죽었다. 지옥에 떨어졌다. 구천을 떠돌게 된다. 금지된 사랑을 선택한 남녀의 이야기를 로댕은 조각해야 한다. 차마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긴장하고 있는 그에게 카미유는 다가와 그의 굳은 어깨를 만져준다. 그녀의 차가운 손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각을 다시 이어나간다. 밤이 늦도록 로댕은 작업하고 있고, 카미유는 짧은 입맞춤을 한 후 집으로 돌아간다. 어두운 작업실에 규칙적으로 들리는 돌이 깨지는 소리. 손을 통해 심장에 느껴지는 미세하고 강렬한 진동.

신곡에 등장하는 파울로와 프란체스카

전쟁 중에 고립되어 자식을 먹어 지옥에 떨어진 우골리노 백작 아래 구천을 떠도는 파울로와 프란체스카를 조각하다. 눈물이 터진다. 어떡하지.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거지. 진짜 사랑이라고 믿었는데.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그녀에게 호언장담을 했는데. 정부에게도 미안하고, 어린 그녀에게도 미안하다. 마음이 복잡하다. 어렵다. 그럴수록 더 몰입해서 조각한다.

사피엔스 스튜디오

다음날 친구들이 찾아온다.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니 기대하는 마음으로 후원자들도 작업실에 찾아온다. 달콤한 키스를 묘사한 부분이 유독 눈에 잘 띈다. 로댕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이 부분만 따로 조각을 몇개 더 해보자고 제안한다. 순간 당황하지만,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옆에서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있는 카미유가 보인다. 얼마든지요 대답한다. 이번 주까지 몇개 만들어 달라고 한다. 후원자는 조각할 청동과 대리석을 왕창 가져다 주었다. 거절할 수가 없다. 얼른 조각해버리고 끝내야지. 야근이 계속된다. 모두가 떠난 작업실에서 그는 이 미련한 남녀를 깍아 만든다. 한개, 두개, 세개.. 사람들은 비싸게 주고 조각을 사간다. 엉뚱한 주문이 밀려온다. 괴롭다. 어쩌지.


메멘토 모리

몇 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치아가 흔들리고,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몇년 전만해도 밤샘 작업은 어렵지 않았는데, 몸이 반응한다. 몸이 무너진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로댕은 죽음을 보았다. 죽음이 보인다. 지옥이 선명하다. 누군가 부르는 듯한 멜로디가 들린다. 지옥에 떨어진 파울로와 프란체스카가 노래하는 것 같다. 마음이 차갑다. 꺼진 담배 불을 다시 켜본다.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
어린 날의 추억일 뿐
추억이라 믿었던 것들은
오래 썩는 기억일 뿐
기억이라 믿었던 것들은
지금 너와 나의 기쁨
깊은 곳에서 숨 쉬는
불행들의 연료일 뿐
Hopeless Romantic - Big Naughty


아침 일찍 카미유가 걸어들어온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는 깊고 느리다. 거울에 비친 로댕의 모습은 처연하고 수척한데, 그녀는 생기가 넘친다. 틀렸다는 것을 이 소녀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미련한 자신에게 전부를 건네 준 이 불쌍한 여자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내가 본 지옥을 그녀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사랑의 속삭임대신 메멘토 모리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그녀를 떠나 주어야 한다.


시작이라 믿었던 것들은
끝의 예쁜 이름일 뿐
이름이라 믿었던 것들
너의 작은 조각일 뿐
조각이라 믿었던 것들이
어쩌면 너의 전부
그 전부를 건넨 너를
사랑이라 믿었을 뿐
Hopeless Romantic - Big Naughty


카미유는 이해하지 못한다. 로댕이 본 지옥이 조각으로 그들에 눈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지만, 그녀는 지옥이 보이지 않는다. 천재 조각가. 사랑을 속삭여준 우상만 보였다.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한 중년의 남자만 그녀의 눈 앞에 있다. 로댕은 설명하지 않는다. 오늘로 조각을 그만두겠다고 그는 말하고 그녀를 떠난다. 그의 지옥의 문을 뒤로 한채 걸어나갔다. 그녀의 지옥이 찾아왔다. 떠난 그를 잊을 수가 없다. 너무 갑작스럽다. 사랑이 전부고 조각이 전부라고 믿었다. 그녀의 세상이 무너졌다. 그가 남기고 간 정을 잡는다. 그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밉다. 그가 불쌍하다. 짜증이나고, 화가 치밀어 올라 부술듯이 조각한다. 애원하는 젊은 여자를 뒤로 하고, 늙은 남자는 떠난다. 가야할 길을 가겠다고, 자신의 외면하고 돌아서던 그가 잊혀지지 않아 조각했다. 그의 손을 잡으려는 길 잃은 여자 조각 옆에 앉아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성숙의 시절 - 카미유 클로델


로댕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연인 곁에 누웠다. 따뜻하다. 얼마만에 눈을 감는 지 모르겠다. 열이 난다. 감기에 들렸나보다. 감기가 낫지 않는다. 익숙한 음식을 차려주었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어쩌지. 메멘토 모리. 다시 생각한다. 어쩌면 마지막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겠구나. 오랜 연인과 장성한 아이까지 있었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유가 많았지. 결혼식을 올리자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1917년 1월 29일로 날을 잡았다. 아내과 된 그녀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같은 해 11월 그는 죽었다.


로댕은 지옥을 보았고 죽음을 기억했다. 그는 죽음을 기억했고, 지옥을 보았다. 죽음을 기억한다. 내 마지막 시간은 분명히 내게 약속되었다. 내게 주어진 한번의 오늘. 한번의 일상. 내가 해야할 일을 하고, 내가 가야할 길을 가야한다. 로댕은 나에게 말해준다. 메멘토 모리.


당신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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