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원쌤 Jan 28. 2019

경쟁이 아닌 공생

경쟁인가? 욕심인가?

생태계 속 경쟁!


“자신을 가꾸고 살리기 위한 경쟁이지 다른 존재를 이기기 위한 경쟁이 아니 다.”


생태계 속 생명들도 경쟁을 한다. 빈 땅이 있으면 그곳을 먼저 차지하고 뿌리내리기 위한 경쟁, 다른 나무보다 먼저 꽃을 피우거나 씨앗을 바람에 날리는 등의 경쟁이 이루어진다. 스스로 살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적응해가는 것. 그것 이 생태계에서의 경쟁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이런 생태계의 경쟁은 폭력적이지도 않고 탐욕스러움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른 봄 우연히 길을 걷다 보게 되었다. 분명 같은 종류의 나무인데 어떤 것은 새 잎이 돋아나 있었고 어떤 것은 여전히 가지만 앙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키가 작은 나무들에는 대부분 잎이 나 있었고 키가 큰 나무들은 아직 잎을 내지 않았다. 식물들에게 햇빛은 그 자체로 생명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식물들은 잎을 최대한 펼쳐 많은 햇빛을 받고자 노력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무들 또한 누구보다 빨리 햇빛을 받길 원할 것이고 당연히 경쟁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피톤치드도 주변에 다른 식물들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분명 식물들도 경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결론은 이렇다. 남을 물리치기 위한 경쟁이 아니다. 그저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경쟁일 뿐.


“적자생존’의 영어 표현에 최상급을 쓰는데(the survival of the fittest), 다윈 본인의 생각은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 가장 적응을 잘한 한 종만 남고 나머지는 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비교적 적응을 잘한 것들은 살아남고 비교적 못한 것들은 사라진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다윈 지능》이라는 내 책에서 감히 다윈 선생을 비판했다. 최상급이 아니라 비교급(the survival of the fitter)을 썼으면 좋았겠다고.”
_최재천 교수의 글 중


      생태계 속 경쟁은 결코 남을 짓밟거나 물리치기 위한 경쟁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경쟁이 자연의 섭리라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한정적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진짜 경쟁은 그런 것이 아니 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빼앗는 행위는 경쟁이 아니라 침략이고 폭력이며 탐욕이라고 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창의경쟁!


경쟁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그 도전이 인류에게 보탬이 되게 하는 것이 다. 인류에게 희망이 되는 분야를 누가 먼저 찾아낼 수 있는가 같은 것을 경쟁이 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끝까지 ‘인류의 자원은 한정적이니 어쩔 수 없다’고 외친다면? 만약 실제로 그렇다 하더라도 남의 것을 빼앗기 전에 먼저 서로 나누어주고 서로 절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인류를 위한 새로운 변화 창출과 인류를 위한 창의적인 생각들의 창출. 이러한 경쟁을 ‘창의경쟁’이라 부르고 싶다.


‘Education is a journey, not a race.’


가끔 자동차를 타고 멀리 여행을 간다. 그럴 때 유난히 앞 차들을 추월해가며 빠르게 질주하는 차들을 만난다. 뭐가 저리 바빠서 운전이 아닌 레이스를 하는걸까 생각하다 우리의 배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우리의 배움도 레이스가 아니다. 내 앞에 있는 차를 추월해 가는 것이 배움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배움은 새로운 차선을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의 뒤를 그저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나와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해 지기 위한 길을 찾아내 고 묵묵히 가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탐욕과 폭력이 아닌 자신의 성장과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하듯이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뻔한 질문과 대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