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교육부의 민낯
왜 교사들은 수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수업 이외의 것들에 대해선 부차적인 것인 듯 대하는 것일까?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에게 수업 이외에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교사의 중요 책무성인 수업! 수업이란 과연 무엇일까?
전 국민의 의무교육이 실시된 이후 학교를 다니며 수업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최소한 의무교육기간은 학교를 다니며 수업에 참여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의무교육에 대해 각자가 가진 생각의 결은 다를 수 있지만 수업을 경험했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겪은 수업은 어떠했나요?’
교사로 20년이 넘게 지내며 수없이 많은 수업을 만들고 진행한 저에게 수업은 상상력의 총체이며 매시간 실험의 자세로 가설을 검증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업을 하기 전 아이들의 반응과 수업의 효과성에 대해 나름의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수업의 절차를 구성하며 실천하며 결괏값들을 모았으며 그 결괏값을 해석하고 수업의 가설과 견주어 결론을 내리면 그 날의 수업이 마무리되는 것이었죠. 모든 교과별로 교과서와 주어진 교육과정이 있는데 왜 이런 실험의 자세로 수업을 하냐고 물으신다면 그 대답은 한 가지입니다.
“아이들은 로봇이 아니거든요. 이 아이들에게 주어진 교과서와 교육과정을 있는 그대로 내미는 행위는 그 자체로 아이들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되니까 그렇습니다.”
올해 만난 아이들은 작년 아이들과 분명 다릅니다. 어제 만난 아이도 오늘 아이들과 다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변화하는 연속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변화하는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이니까요.
교사들은 교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서 따로 교육을 받고 발령을 받습니다. 여러 가지 교직 관련 전공들을 공부하며 각 교과별 지식과 아이들에 대해 알게 됩니다. 하지만 교사의 수업은 이렇게 대학 때 배운 내용들로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당연하게도 교사 자신의 삶이 투영될 수 밖엔 없습니다. 교사 또한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의외로 교사 개인의 삶이 중요해지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주어진 것들은 누구나 다룰 수 있지만 교사 개개인의 삶은 교사 자신만이 이해하고 다룰 수 있을 테니까요. 이렇다 보니 같은 교과, 같은 학년의 교사라 하더라도 전혀 다른 교사처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사의 삶을 다룬 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전 그것이 교사가 가진 삶의 태도, 다른 말로 교사 스스로 상상하며 창조하는 사람이기를 바란답니다.
“상상력이 없는 수업은 공허합니다!”
수업을 제 나름의 이름으로 불러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상상랩 Class”
상상력과 그 상상력의 실험실이 교실이라면 어떤 모습의 수업이 펼쳐질 수 있을까요? 교실이라는 장소가 아닌 교사의 상상력과 실험의 과정과 결과가 기록되어질 교실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게 됩니다. 교사의 탄생에서 언급한 장소(Place)가 아닌 공간(Space)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완성됩니다. 교실은 누구나 와서 사용할 수 있는 장소를 넘어 모두의 이야기가 숨 쉬는 우리의 공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의 경우 유치원에서 막 올라와 가장 당황하는 것들 중 하나는 학교가 가진 딱딱함입니다. 유치원에선 훨씬 부드러운 교실환경 속에서 지내다 초등학교 고학년과 똑같이 생긴 교실에서 수업을 받아야 하니 당연한 느낌일 것입니다. 이런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교실을 아기자기 예쁘게 꾸미며 아이들이 낯설지 않게 노력하는 선생님들도 많으십니다. 우리가 집에서 어린 자녀의 방을 아기자기하게 꾸며주고 싶은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교실의 환경을 꾸미는 일은 단순히 인테리어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 속에 아이들의 이야기가 들어가 우리의 공간을 창조하는 것과 더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학급이라는 공간이 학생 개개인과 학급 전체 그리고 교사에게 하나의 상상력이 숨 쉬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저학년 교사가 여러 가지 아이들의 생활모습을 관찰하다 하나의 상상을 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구석에서 자신의 몸을 숨기거나 어두운 터널 같은 곳을 통과하고 나오는 것을 흥미롭게 여기는 것 같아. 그러면 우리 교실에서 아이들이 숨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어떨까? 터널 같은 것을 만들어 통과하는 경험을 교실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교사는 아이들이 보이는 모습을 보며 이런 상상을 합니다. 이런 상상을 실현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교사이기에 수업과 아이들과 함께하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래, 아이들과 커다란 구조물을 만드는 거야. 상상 동굴을 만드는 거지. 쉽게 부서지지 않으면서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면 좋겠어. 교육과정에 나와있는 미술 관련 내용과 연계해서 만들기를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 필요하면 우유를 먹는 아이들의 빈 우유갑을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리고 터널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 모두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아이들이 몸을 사용하여 수업에 참여하도록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터널을 통과하라고 하면 안 할 수도 있으니 국어시간 관련 그림책을 하나 읽어주며 상상하도록 만들면 좋을 것 같아. 물론 실제로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할진 해 봐야 알겠지만 말이야. 터널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커다란 박스를 몇 개 이어 붙이면 좋을 것 같아. 터널 외부는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의 내용이 들어가도록 꾸미면 더 친근하게 느낄 것 같아. 상상 동굴은 우리 반 뒤쪽에 있으면 될 것 같아. 터널은 우리 반 가운데를 지나가도록 만들면 좋겠어.’
교사는 아이들과 교실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만드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합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이 이미 상상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현실의 벽을 만나게 됩니다.
‘아! 맞다. 우리 교실은 아이들 수업이 끝나면 방과 후 수업이 있지. 그러면 어떻게 하지? 상상 동굴은 어디다 둬야 하나? 터널을 만들어놓으면 자칫 망가질 수 있을 텐데…. 그렇다고 방과 후 수업시간에 내가 교실에 있을 수도 없는데… 더 큰 문제는 아이들과 함께 만들기를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매 시간 이어서 만들어도 며칠은 걸릴 수 있는 활동인데… 그러면 그냥 내가 혼자 하고 쉽게 치울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나? 그러면 아이들은 상상하지 못하거나 작은 상상만으로 끝날 텐데…’
학교와 교실을 단순히 장소로만 바라본다면 일정한 시간만 사용하고 빠져나가면 그만인 곳이 됩니다. 하지만 학교와 교실을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으로 본다면 그곳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학교와 교실은 장소인가요? 아니면 우리의 공간인가요?
교사들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학교 공간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교사만 수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누군가 이야기한다면 전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수업은 교사가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과 함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공간에서 교사의 상상력과 아이들의 상상력이 자라는 것이 수업입니다.”
최소한 학교에서만이라도 교사들이, 학생들이 상상하고 자신들의 상상력이 오랜 시간 실현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이야기가 교사들의 이야기랍니다. 정말 우리 교육을 생각한다면 몇 개의 강좌가 학교에서 열리고 몇 명이 참여했다는 식의 양적 접근만 하지 말고 그 속에서 펼쳐지는 질적인 접근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이들과의 수업 한 시간이 무어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교사들은 단순하게 수업을 진행하지도 않고 그렇게 수업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학교현장을 제대로 보고 정책을 펼쳐주기를 교육부에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