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TV 없이 아이들을 키워봤는데요...
결혼할 때부터 TV는 안 샀다. 이유는 단순했다. 남편이 야구를 너~무 좋아하는데, 야구할 때 TV에 푹 빠져있을 것이 너무 뻔해 미리부터 꼴 보기 싫어 사지 않았다. 물론, 중요한 건 폰으로 보거나 노트북으로 보면 된다고 남편도 동의했다. 그렇게 TV 없이 살기 시작했다. 나는 드라마 광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재미있다는 드라마는 다운로드하거나, 한국드라마 사이트 찾아 들어가서 봤다. 불편함은 없었다. 남들이 '골!'을 외칠 때 어리둥절한다거나, 다음 해를 알리는 웅장한 보신각 종소리를 남들보다 몇 분 늦게 본다는 정도의 차이만 쿨하게 무시하면...
아이가 태어났고, 여전히 TV는 없었다. 다른 엄마들이 TV를 틀어놔야 아이를 잠깐 두고 내 볼 일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남편의 야구사랑은 엄청났기 때문에 TV를 틀어놓으면 남편마저 큰아들로 변신할 것 같아 절대 TV를 살 순 없었다.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셨는데, 다행히(?)도 친정집에는 TV가 있었다. 우리 엄마는 덕분에 좀 살만하셨겠지만, 아이들은 4시 30분 EBS에서 방영하는 만화를 시작으로 8시 일일연속극까지 할머니집에서 다양한 한국말을 섭렵했다. 다행히도 우리 집에 오면 원래 TV가 없어서 그런지 그냥 뒹굴뒹굴~ 장난감이나 책, 저지레를 하며 놀았다.
문제는 주말이었다. 주말에는 정말 시간이 남아돌았다. TV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아침부터 집 근처 뒷산 한 바퀴 산책하고, 점심 먹고 마트 들러 공원 갔다가 집 앞에 놀이터까지 찍어도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집에서는 장난감이나, 뒹굴뒹굴, 책 읽기, 그림 그리기, 만들기, 역할놀이, 악기 두드리기, 저지레 하기 등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한 시간씩은 컴퓨터로 만화를 틀어주기는 했다. 나도 쉬어야 했기에...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남편이 야구에 빠져서 내 말을 듣지 못하는 것이 싫었나 보다. 뽀로로라도 보여주려면, TV를 살 법도 했는데... 안 사고 버틴 걸 보면. ㅋㅋ
그렇게 초등학생이 되었다. TV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조용한 시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놀기나 뒹굴거리기, 멍 때리기, 만화 그리기 등)을 한다. TV가 없어 뭔가 힘들었던 것 같은 그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큰 아이는 TV 볼 시간을 자연스럽게 책으로 채웠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TV를 켜면 시간이 휘리릭 증발되는데, TV 소리가 없는 집이 너무도 당연하여 아이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했다. 그러나 이 감사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 하고 싶은 일에는 태블릿 하기도 포함되었다. 아케이드 게임도 하고, 좋아하는 유튜버를 구독하기도 하고, 검색해서 관심사를 찾아보기도 한다. 태블릿은 최대 2시간까지만 하자고 했지만, 숙제하고 할 일 하면 2시간 보기가 쉽지 않아 잘 지켜지는 듯하였으나...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자 유혹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특히 둘째는 각종 유튜브를 섭렵할 만큼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기록하기'이다. 책에서 배운 건데, 유튜브를 보면서 기록하는 것이다. 채널명, 영상제목, 분야, 키워드, 왜 봤는가, 기억에 남는 것, 배운 것, 이 영상을 보고 든 생각을 간단하게라도 쓰는 것이다. 유튜브는 휘발성이다. 괜찮은 정보나 지식영상을 우연히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려고 하다가도, 연이어 추천되어 나오는 웃긴 쇼츠에 건설적인 생각인 증발 해 버리게 된다. 그래서 하루에 2개만이라도 저렇게 정리하면서 유튜브 시청의 발자취를 남겨보자고 하려고 한다. 물론, 나도 해보려고 한다. 아이만 시키면 뭔가 숙제처럼 돼버려서, 나도 같이 기록하고 아이와 서로 바꿔서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유튜브 시청 후 기록은 아직 계획이지 하지 못했다... (띠로리) 아이디어는 너무 좋은데 이게 잘 안된다.
의도하지 않게 12년 동안 아이들을 TV 없이 키웠다. 결과적으로는 무엇이 변했나. TV를 없앤다고 아이들을 미디어로부터 단절시킬 수는 없다. TV 대신 책을 읽힐 수도 없다. 다만, 아무 생각 없이 집에 오면 틀어놓는 그 행위는 없앨 수 있다. 즉 생각 없이 TV 보기는 막을 수 있다. TV가 없음으로써 내가 당장 중요시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작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그냥 천정보고 대자로 누워있는 멍 때리기를 한다 하더라도, 심심해서 떼굴떼굴 굴러다닐지라도 아이에게 '심심하다, 뭐 할까?'라는 생각이 있기를 바랐고, 그 하나는 이뤘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의 결과가 '유튜브 보기'라는 현재 결과는 매우 뼈 때리지만... TV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게 '車' 떼고 장기 두는 것과 유사하겠지만, 그래도 해 볼만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