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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May 09. 2016

먹는 여자

키커와 한 숨

무엇을 해야 할까?

아람은 아이 둘을 떼 놓고 나오니 갈 데도 없고 시간이 비었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아람은 극장에 가서 영화를 한 편 보고 남는 시간에 카페에 앉아 책을 읽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황금 같은 주말 네 시간 동안 컴컴한 극장 안에 들어앉아 집중해서 영화를 볼 자신이 없었다. 저녁에 시댁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으니 어버이날 선물로 카네이션이랑 딸기 케이크를 사서 얼른 집으로 갈까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우희가 선생님의 손을 잡고 우정이 품에 안긴 채아람이 현관문 앞에서 바이 바이 손을 흔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엄마와 내내 있었던 것이 지겨웠나 그새 컸다고 둘은 생글생글 웃으며 아람과 헤어졌다.

누군가 만날까?  다시 취업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아람은 조바심이 났다. 벌써 집에 들어앉아 씨름만 한지 4년이 지나 버렸다. 이대로 쭉 가정 주부로 살아야 하는 건가? 네덜란드에는 전업 주부란 없다는데 그렇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애 둘을 키우며 취직을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것 이란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어찌 되었든 경력은 단절된 지 오래고 새로운 일을 찾아 인턴을 하자니 나이가 많아 짤랄게 뻔했다. 예전 상사에게 연락을 해볼까 싶어 카톡을 보내본다.

'대표님, 잘 지내시죠? 요새도 출장 많이 다니시나요? 커피 한 잔 얻어먹고 싶은데 언제 시간 되세요?'보내기 버튼을 눌렀지만 어찌 된 일인지 와이파이 연결이 끊겨 메시지는 공중 분열된다. '나를 차단했나?' 아람은 굴욕의 기분을 느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하행선 열차는 두 대가 떠났고 상행선 열차도 한 대가 지나갔다. 곧이어 상행선 열차가 들어온다는 스피커 알림에 아람은 CGV 극장에 가기로 했다.

극장 간판에는 마침 나홍진 감독의 신작 <곡성>이 걸려있다. 귀신 나오는 영화 한 편 보고 가면 되겠다란 생각이 들어 매표소에서 표를 끊으려고 했는데 아직 미개봉이다. 또다시 무슨 영화를 봐야 할지 아람은 멘붕이 왔다. 제목들을 훑어 보았지만 아는 영화가 하나도 없다. 음식에 대한 일본 영화 <하나와 미소시루> 한편, 베를린 영화상을 받았다는 노인 커플의 사랑 영화 <45년 후> 한 편, 중국 청춘 영화 <나의 소녀시대> 한 편, 배우 에단 호크가 감독을 했다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한 편이 눈에 띄었다. <비틀스: 하드 데이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왠지 대중적이지 않은 것 같아 다시 망설여졌다. <트롬본>이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영화가 매표소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아람은 포스터를 들춰본다. 게리 올드만이 타자기를 끼고 정면을 주시한 채 앉아있고, <로마의 휴일> 천재 작가의 실화라는 카피가 읽혔다. 그중에서 골라야 한다는 것은 아람에겐 선택의 폭이 너무 넓다. 물론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너무도 유치해서 그대로 패스해도 상관없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람은 여전히 표 한정을 사지 못한 채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밥도 아직 안 먹었는데 밥이나 먹으러 갈까? 근데 나올 땐 영화 보려고 나왔는데 뭘 먹지? 김치 볶음밥? 설렁탕? 에이 배 부르기 싫은데 그냥 영화 볼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그렇게 테라스가 보이는 커피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아람은 앉았다. 막상 앉으니까 모든 고민과 생각들이 그냐로 멈췄다.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뭉쳐있었던 근육이 슬금슬금 풀리기 시작하면서 이내 손 끝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강한 나태함이 모든 걸 이겨버렸다. 그러저 놀랍게도 눈이 일을 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그리고 생각났다. 아람은 가방을 뒤졌다. 얼마 전 배고플 때 먹으려고 사놓은 키커가 있다. 초코 바 중에서 가장 칼로리가 낮은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삭거리는 느낌이 좋아서 아람은 키커를 간식으로 먹는 것이다.   따뜻하게 부서지는 햇살을 맞으며 아람은 길게 한 숨을 쉬어 보았다. 십 년 묶은 체증이 가시는 듯했다. 무릎 아래로 김이 모락모락 빠지는 기운, 팔뚝과 등에 얹혀있던 통증의 기운도 숨과 함께 내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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