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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May 10. 2016

먹는 여자

화와 잡곡밥

아람은 일어나자마자 찬 물로 세수를 한 뒤 맨투맨 티셔츠를 훌러덩 벗는다. 우희와 우정이를 일곱 달씩 도합 14개월 간 모유 수유를 하고 난 뒤부터 아람은 브래지어가 영 불편해서 차질 않았다. 그렇다고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입장으로 맨 꼭지로 다닐 수는 없는 터라 하는 수 없이 와이어가 없는 브라를 한다. 사실 와이어가 있든 없든 브래지어는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중력에 의해 길게 축 늘어진 유선이 트인 가슴의 아람에겐 마치 아프리카의 부시맨에게 콜라를 던져 주자 기뻐 들고뛸 만큼이나 좋지만은 않은 것이다.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보면 뉴욕에선 패브릭 위로 솟은 유두가 유행이 되는 바람에 침을 발라가며 꼿꼿이 세우기도 하고 심지어 돋보이게 하기 위해 가짜 젖꼭지를 붙이기까지도 하던데 서울에도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어쨌든 아람은 지방층이 한층 두꺼워진 가슴을 안에서 밭깟쪽으로 힘차게 돌린 후 부엌으로 가 솥뚜껑을 열었다.


현미와 찹쌀을 3:1 비율로 흑미와 콩을 한 줌 씩 섞어서 밥을 짓는다. 꼬맹이 딸들은 스크램블 에그랑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서 먹이고 큰 아들은 치킨 너겟과 오렌지 주스를 만들어 주기로 한 아람은 부엌을 왔다 갔다 한다. 월요병이 생겼는지 아무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다.  우현이 일어나 뭔가를 먹더니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간다.  

"어젯밤에 잘 잤어요."

우희가 눈을 비며 나와 인사를 하고 식탁에 앉아 뭔가를 먹는다. 아람은 이제 커피를 내린다. 어느 새 욕실에서 나온 우현이 커피가 든 컵을 들고 묻는다.

"이거 마시면 돼?"

"응"

아람은 대답한다. 우희가 울면서 방에서 나온다. 아람은 아직 말을 못 하는 우희를 안아준다.

"좋은 아침!"

라지 사이즈 하나, 스몰 사이즈 하나, 아람은 우정의 기저귀부터 갈아준다. 그리고 우희를 치카치카시킨 후 아람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어린이 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유모차 두 대를 동시에 밀고 갔다.

"어머니, 오늘은 점심 먹고 갈 거니까 우희 데리러 12시 반쯤 오세요".

아람은 낮잠까지 자고 올 것을 기대했는데 선생님의 말에 갑자기 안에서 뜨거운 것이 끊어 오른다.

"지난주 내내 적응한다고 오전에 데리러 왔었는데 언제까지 그래야 하나요?"

"유아 반도 다 그렇게 하고 있어요. "

아람은 선생님의 어설픈 변명에 이상함을 느꼈다. '우희는 사랑반이고 이미 4살인데 뜬금없이 왜 유아반을 들먹이는 거지?' 아람은 할 말이 많았지만 알았다고 대답하고 그대로 물러났다. 며칠 전 우정이네 샘물반 카톡방에서 나눴던 대화 내용이 생각났다. 우희와 같은 사랑반의 수진이 엄마가 톡을 걸었다.

"언니, 이제 편하시겠어요!"

"이제 우리는 두 아이가 같은 반 학부모네요 흐흐"

아람이 대답하자 시은 엄마도 한 마디한다.

"와 축하합니다. 전 후보 3번이더라고요. 에효 마음 비우고 있어요".

아람은 계속해서 내질른다.

"어린이 집 기념으로 커피 턱 쏠게요".

"커피 만으로 되겠어요? 쿠키도요".

"조아 조아. 요번 주는 그렇고 담 주 수요일 어때요?"

"저는 담 주 친정 가요, 일주일 동안. 두 아이를 데리고 비행기로 두둥"

대화 내용은 결국 짱깨를 시켜 먹는 걸로 일단락이 지워졌다.

확~ 그냥! 막! 그냥~

집으로 돌아온 아람은 당장이라도 엎어 버리고 싶은 심정을 꾸욱 눌러 참았다. 성질대로 하자면 어린이 집이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수도 있었다. 우희가 우정이와 함께 집 앞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어 잘 됐구나란 행복은 잠시 뿐이고 적응하는데 또다시 한 달을 고생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진 것이다. 예전에 아람은 화를 참지 못했다. 아마도 뻣뻣하게 굳어진 얼굴빛을 감추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코를 벌렁거린다거나 매섭게 쏘아붙이며 다그쳤을 일이다. 하지만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람은 우왕좌왕 거렸다. 점점 칼날이 무뎌가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쿠쿠가 취사를 마쳤습니다. 맛있는 밥 드세요".

국그릇에 주걱으로 한 주걱 듬뿍 한 주걱 조금으로 두 주걱 퍼서 아람은 맨 밥을 먹었다. 화가 일 단계 싱거워졌다. 우희가 먹다 남긴 스크램블 에그도 마저 먹었다. 화가 일 단계 더 담백해졌다. '밥 참 맛있구나!' 아람은 밥도둑 화 반찬으로 한 그릇을 그렇게 뚝딱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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