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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Jul 18. 2018

입술을 깨물다

도자기축제

'따르릉따르릉'.


채연은 텅 빈 공터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파스텔톤의 연노랑색 스마트폰 커버가 악의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귀엽기만 하다. 핸드폰 액정이 푸른빛을 띠며 대기에서 통화로 넘어가자 전화기 너머 누군가가 말을 한다.


"여보세요."

"뭐해?? 자다 일어났어?"

"아아 니, 웬일이에요?"

"자다 일어났네 뭐, 그럴 것 같아서 전화했어. 나 남자 친구 생겼어."

"뭐? 그으으래"

"완전 내 이상형이야. 그 남자랑 같이 도자기 축제에 가기로 했어."

"어, 잘 됐네요. 축하해!!"

"제발 잘 되길 빌어줘, 상혁이 너도 빨리 더 좋은 여자 만날 거야."

"어, 그그그래. 잘 되길 빌어줄게."


채연과 상혁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뭔가 말도 안 되는 그럼 이별이다. 어떻게 이렇게 끝날 수가 있는 거지? 상혁은 생각했다. 잠깐 낮잠을 자고 있었을 뿐인데 얼마 전꺼까지만 해도 별문제 없이 지냈던 채연에게 말도 안 되게 이별을 통보받은 것이다.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럼 지난주에 같이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게 조개 파스타랑 조각 케이크 까리 먹었던 건 아무 의미 없는 한 끼 식사일 뿐이었나? 상혁은 잠시 머리가 핑 도는 걸 느낀다.


도자기 이천 축제.

하얀색 바탕에 파란색 추상무늬가 새겨진 도자기들이 장터 곳곳에 진열되어 지나가는 관광객들은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다. 군중 속에 채연과 종수는 관광 같은 데이트를 한다. 꼬마 여자 아이와 꼬마 남자아이가 엉덩이를 쭉 빼고 뽀뽀를 하는 도자기, 하트 모양의 접시를 채연은 예쁘다고 종수에게 보여준다. 종수 역시 도자기 전시 중간중간 보이는 식료품점에 갖가지 치즈들을 알려준다. 에멘탈 치즈, 고트 치즈, 노랑 치즈, 파랑 치즈, 초록 치즈 들은 하나 같이 전부 다 맛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각 자가 그 둘의 눈을 사로잡는 것을 카메라로 담는다. 채연이 다리 위에 앉아 쉬고 있는 여자 친구들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담으면 종수는 빈 공터의 공사 현장을 루믹스 파나소닉 똑딱이 카메라로 찍는다.  채연은 사진학과 졸업생이고 종수는 건축과 대학원생이다.  그러다 보니 채연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종수는 건축에 관심이 가다 보니 자연스레 카메라에 담는 것이다. 


채연의 마음속에는 상혁에 대한 생각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다. 어떻게 순식간에 지난 2년간의 만남이 송두리째 없어지고 만 걸까? 동갑인 채연과 상혁은 학교에서 만나 비록 수업을 같이 듣진 않았지만 같이 자료 조사도 하기 위해 스터디 그룹 활동도 같이하고 상혁의 과제가 있으면 채연이 두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기도 하고 수업이 끝날 때쯤 먼저 끝난 사람이 나중에 끝날 사람을 기다려 근처 술집에 가서 맥주 한 잔씩 하며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었는데 채연은 너무도 쉽게 모든 걸 전부 던져 버렸다. 


채연이 종수에게 빠진 건 토마토 스파게티 때문이다. 채연이 학교 근처에서 친구들과 자취를 할 때 대학원 선배 집에서 술파티를 한다고 놀러 갔다가 선배의 친구라며 종수를 처음 만났다. 그 날 종수는 뜬금없이 토마토 스파게티를 해준다며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스파게티 면을  삶고 토마토소스를 만들었다. 그 뒤로 채연은 종수와 연락을 하게 되었고 만나지 않고 장거리 메일을 주고받는 것은 매일 보는 상혁보다 더 큰 그리움을 만들게 되었다. 


채연은 왜 종수에게 빠지게 된 걸까? 상혁과 있으면 채연은 항상 빼앗긴다는 생각이 든다. 과제를 빼앗기고, 아이디어를 빼앗기고, 노동력을 빼앗기고, 그 대가는 맛있는 한 끼 식사이다. 때로는 술 한잔. 종수와 있으면 그 반대이다. 채연이 종수에게 도자기를 사서 선물해 주고 치즈를 종류별로 사서 와인과 함께 곁들여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사이 종수는 채연에게 창작의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한 번은 종수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며 p3 파일을 들어보라고 보냈다.

또 한 번은 채연이 자기가 쓴 단편 소설이라며 종수에게 보냈다. 

그러면 종수가 자기가 원하는 건축 스타일은 크진 않지만 공간 속에 이야기가 있는 소소한 재미로 돈 걱정은 많이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채연이 주말 출사 나가서 찍은 홍대 거리  공간 사진들을  종수에게 보내주고 이런 곳에서 밤새 놀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을 얘기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둘은 만나지 않았지만 서로의 관심과 서로의 생각 속에 침투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나면 둘은 취향이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채연은 자연스럽게 종수의 친구들과도 친해졌다. 한 번은 종수가 일이 있어 늦어지는 바람에 채연은  종수의 친구들과 중국집에서 종수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 1이 메뉴를 보더니 주문을 한다.

"난 새우 깐풍기".

그러자 그 옆에 친구 2가 이어 주문을 한다.

"난 볶음밥."

그렇게 각자 하나씩 시키고 채연이 제일 맛없어 보이는 메뉴를 시켰다.

"난 저 쪽 테이블에 저 여자가 먹는 거 맛있어 보이는데, 계란탕인가?"

그럼 곧장 친구 1이 면박을 준다.

"으윽! 비 오는 데 맛있는 거 먹지, 계란탕은 아닌데~!"

그때 마침 종수가 빗물을 털어내며 의자에 앉아 채연의 편을 든다.

"왜 나도 맛있어 보이는데, 난 짜장면."


한 번은 채연이 사진 출사를 나가서 종수와 친구들과의 약속에 늦는 날이 있었다.

약속 장소인 종수에 집으로 갔지만 조용할 뿐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는데 갑자기 불이 환하게 켜지며 서프라이즈 생일 파티 풍선과 케이크가 준비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생일이었는데 마치 채연의 생일처럼 느껴졌더랬다. 


장거리 연애는 하지만 반년이 좀 지나서야 끝나고 말았다. 채연은 사진 전시를 할 수 있었지만, 종수는 대학원 논문을 마치지 못해 낙제를 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둘은 연락이 뜸해졌고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릉따르릉'


발신자는 상혁이다. 채연은 받을까 말까 하다가 그저 바라만 볼뿐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전화벨이 울리다가 끊긴다.


'왜 전화한 거지?'


채연은 잊고 있었던 상혁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가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인다.

그러자 곧이어 문자 한 통이 온다.


'나 여자 친구 생겼어. 근데 잠수를 타서 전화를 안 받아 어제부터. 혹시 너 가영이랑 같이 있니? 같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 좀 해달라고 하면 안 될까?'


'뭐 이런 정신없는 미친놈이 다 있지?? 가영이?? 걘 내 직속 후배잖아!!!!'


채연은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머리끝에서부터 치밀어 오르기 시작하는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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