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솔길 Jul 19. 2018

입술을 깨물다

신데렐라

채연은 시답잖은 문자를 상혁에게 받은 뒤로 방 안에 들어앉아 곰곰이 되씹어 보았다.

'어쩌라고'


그리곤 전화를 건다.

"너 가영이랑 사귀니?"

"어."

"언제부터??"

"좀 됐어. 지난주부터."

"너 머리에 든 거 없이 얼굴만 예쁜 애는 싫다고 그러지 않았니??"

"내가 그랬나??"

"너 어떻게 말을 그렇게 확 바꾸니??"


채연은 벌컥 화를 내고 전화를 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영이 더 예쁜 것 같지 않은데 상혁이 채연에게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나이가 더 어린 가영을 만난다니 어차피 처음부터 자기 뜻대로 맞춰줄 내가 필요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나 해야겠다. 채연은 학교 도서관 게시판에 나 붙었던 공고가 문득 떠올랐다. 

'불국사, 구도를 다시 잡다, 동남아 교환 학생들과 함께하는 대학 연합 사진 콘테스트. 조교 구함'.


초가을로 들어가는 입추지만 덥다. 땡볕에 흐르는 땀 때문에 채연은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한 손엔 리플렉터, 다른 한 손엔 워크숍 프로그램북을 들고 잡사팀들과 함께 경주 불국사를 산책 중이다. 콘테스트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서른 명쯤이다. 각 팀은 둘로 나눠져 한 팀에 15명씩 동남아 각지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혹은 사진작가가 되기 위해 작품이 필요한 지망생들이 비행기를 타고 왔다. 경주를 테마로 사진 콘테스트를 여는 것은 교환학생 프로그래 중 한 커리큘럼으로 여기서 상을 받게 되면 이후에 포토그래퍼 페어에도 자연스레 참여의 길이 열리는 유명한 행사인 것이다. 채연은 A팀의 조명을 맡았다. 조명이래 봤자 야외에서 촬영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로 무거운 장비 필요 없어 달랑 반사판만 챙겨 들고 가면 되겠지 채연은 생각했다. 


일본에서 온 요스케, 싱가포르에서 온 텍림, 몽골에서 온 밭, 필리핀에서 온 얌 수안...

채연은 요스케가 좋아서 조명부를 들었다.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했지만 한국어와 일본어와 영어보다 더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건 그림이었다. 종이와 펜을 들고 다니며 채연은 부지런히 그림을 그려 어떻게 사진을 찍을 건지 이야기를 나눴다. 요스케는 건물 전체에 비닐을 씌워서 물방울처럼 반사되는 아른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채연은 요스케가 한없이 멋있다고 느꼈다. 그 옆에는 텍림이 카메라를 들고 구도를 잡았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불국사의 전경을 담으려는 그의 노력은 채연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진 찍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둑어둑해진 불국사, 슬슬 배가 고파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  감나무 아래로 모여들었다. 요스케가 점프를 해서 감 하나를 따 채연에게 준다. 그러자 키가 큰 텍림이 더 높이 뛰어올라 채연에게 더 큰 감을 따 준다. 그걸 보고 있던 밭은 아예 나무에 기어올라 감나무를 흔들어 감을 우수수 떨어뜨리며 아이처럼 좋아한다. 채연은 산적같이 생긴 커다란 덩치의 밭이 외모와는 달리 친근하게 느껴진다. 

A팀은 그렇게 감 하나씩 손에 들고 사진 출사를 마쳤다.


"채연, 넌 교환학생이랑 현지 조교랑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해?"

요스케가 채연에게 묻는다.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안 될 이유가 있어?"

채연이 대답하자, 모두들 와아 웃는다.

"채연, 로맨티시스트, 유 아 로맨티시스트."

그러자 옆에 있어 텍림이 또 심각하게 낮에 찍었던 사진을 모니터링하며 채연에게 보여준다.

사진은 온통 채연의 얼굴이다. 채연이 부끄러워 갑자기 얼굴이 빨개진다.


그때 또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따르릉따르릉.


"채연아, 나 상혁이. 나 가영이랑 헤어졌어."

'뭐? 벌써?? 아니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하지만 채연은 속으론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영이는 사실 채연이 생각해도 자기보다 예쁜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나 지금 경주거든. 서울 올라가면 연락할게. 술 한 잔 하던가 하자."

"언제 또 경주엔 갔어? 나도 다음 주에는 외국 나가는데..."

"아.. 그래?? 부럽다. 잘 됐네. 그럼 끊어."

"술은 사는 거다."

"얻어먹어 그래, 사줄게."


채연이 전화를 끊자 분위기가 갑자기 고요해진다. 

작가의 이전글 입술을 깨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