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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Jul 25. 2018

입술을 깨물다

넋 혹은 긴장은 때론 부재중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채연이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침대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채연은 어제 하루 월차를 내고 하루 웬 종일 잠에 빠졌었다. 태권도 사범님과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와서도 비는 그치지 않고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아서 그런가? 기온이 떨어졌는데도 옷을 얇게 입고 있어서 감기에 걸린 건가? 목도 조금 아프고 콧물도 흐르고 열도 좀 나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계속 누워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채연은 느릿느릿 일어나 신발을 신고 나온 것이다.


수화기를 들어 전화를 건다.

"동수 씨, 홈페이지 업데이트하는 것 때문에 전화했는데요...

http 누르고요, R. A. S. B. E. R. R. Y. 요. 됐어요. 들어가는 거죠?"

채연이 컴퓨터 모니터 위에 뜬 하얀 바탕에 검정 글자와 단출한 몇 가지 CMY 색들을 보면서 요리조리 창을 들여다본다.

"이번 달 말에 드디어 사진 전시가 있거든요. 아! 여기 라즈베리 누르면 되는 거죠? 제목이랑 사이즈랑 작가랑 인포들 올려져 있네요. 근데 추가할 부분이랑 수정할 부분이 있는데 프로그램이 좀 번거롭네요."

채연이 자기 할 일에 집중한 나머지 혼자만 계속 떠들고 상대 쪽 동수 씨는 아무런 말이 없다.

"작가가 중국인인데 한자로 쓰고 한글도 넣어야 하나요? 한자는 어떻게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글자가 좀 많아요. 6갠데 크기 조절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거예요??"

말이 없던 동수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필요한 부분 메일로 보내주시면 제가 고쳐드리겠습니다."

"그냥 제가 여기서 할게요. 시간 걸리잖아요. 하나 고치는데 시간 엄~~ 청 오래 걸리던데요."

"채연 씨, 저번에 보내주신 문서 메일 한 번 열어보시겠어요?"

"네, 왜요??"

"거기 제목 뭐라고 쓰여있죠?"

채연이 문서를 열자 오타 투성이다. 

베로댄앵글->베러댄 앵글, 심영탁-> 심용탁, 망고-> 몽고, 1797->1997, 도자지->도자기 등등.

채연은 사진 작품을 써서 보낼 때는 전혀 알지 못했던 실수들이 동수 씨가 지적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타도 오타지만 홈페이지에 인포를 올리는데도 일이 많았을 텐데 틀린 오자 감수까지 봐가면서 작업을 했을 동수 씨를 생각하니 낯을 들기가 뜨거워졌다. 

"으악~~! 이게 왜 다 틀렸지?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괜히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채연은 낯 두껍게 얼버무렸다. 


채연은 그냥 책상에 앉아서 메일을 주고받기만 하면 되는 말만 잘하면 되는 일인 줄 알았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생기자 잠시라도 긴장을 놓아선 안 되는 압박에 어깨가 거북이 등처럼 점점 뭉쳐가고 온 몸이 누군가에게 두들려 맞은 것처럼 쑤시고 목이 돌아가질 않는다.

    

'안 되겠다. 오늘 아무래도 부황이라도 뜨던가 마사지 좀 받아야겠다.'

그러면서 채연은 10회권을 끊으면 한 번 하는데 4만 원인 평소 경락 마사지 아줌마에게 예약을 하려고 문자를 보낸다. 그러자 동수로부터 문자가 온다.


'저녁 7시 40분까지 마이크 가지고 함흥 밥집으로 오세요." 


채연은 마이크라니 웬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무슨 심부름을 시키려나 보다 싶어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경락 마사지는 취소학 알았다고만 한다.


함흥냉면 집은 평범해 보이는 간판을 지나, 더 평범해 보이는 홀 안 줄줄이 늘어선 테이블과 의자들을 지나, 안 쪽 문을 열자 빽빽하게 사람들이 앉아 있다. 


모두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전부 남자들이다. 동수의 친구들인가 보다. 전부 시커멓고 눈은 반짝거린다. 

동수는 한쪽에서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 A4 용지 위에 꼬물꼬물 말아 올려진 샙그린 마리화나가 서 너 덩이 올려져 있고, 동수는 하얀색 창호지만큼 비치는 얇은 담배 마는 종이 위에 Tobacco라고 쓰인 납작한 봉투 안에 그득 들은 담배를 빠개서 가루를 만들어 낸 것 같은 약초를 세심하게 골고루 배치한다. 그 위에 좀 전에 꾸덕꾸덕한 초록 잡초를 손가락으로 빠개서 갈색 토바코 부스러기와 같이 섞는다. 그리고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이자 종이가 타들어가면서 훅 동수가 한 모금 빨아들이자 기침이 쿨럭쿨럭 터져 나온다. 입 안 한 가득 불 맛 약간과 함께 연기가 입 안에서 스며 나오고, 동수는 바로 옆에 있는 친구에게 조인트 한 대를 넘기니, 친구는 조용히 혼자 냉면은 한 입에 털어 넣는 듯한 자세로 한 모금 빨고 두 모금, 그리고 그 옆 자리 친구에게 조인트를 넘긴다. 세 번째 친구는 커피를 마시 듯 가볍게 하지만 깊게 한 모금을 빨고 옆 자리 친구에게 넘기지 않고 채연에게 조인트를 건넨다. 채연은 영문도 모른 채 마리화나를 받아 들고 어깨를 으쓱 올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동수가 친절하게 대마초를 피우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렇게 엄지랑 검지로 살짝 쥐고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서 숨을 훅 들이마셔보세요. 스~~ 읍!"

채연이 담뱃대를 떨어질 듯 말 듯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물건을 드는 듯 잡으며 한 모금 들이쉬자 훅하고 구름과자가 입 안 가득 찬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있자니 하루 종일 신경 써서 따끔따끔거렸던 눈알, 마우스를 하도 클릭해서 생긴 검지 손가락 통증, 뭉쳤던 어깻죽지, 담 걸려서 뻣뻣했던 목이 스르륵 부풀어 오르며 기분이 좋아진다. 

그때 함흥냉면이 눈 앞에 보인다. 좀 전부터 동수가 시켜서 가지고 왔던 마이크를 의자 구석에 내려놓고 냉면 한 젓가락을 먹으니 시원하고 달콤하고 매콤하다. 


"이제 마이크 다시 들고 가세요."


한 그릇 비우자마자 동수가 채연을 돌려보낸다.


버스를 타고 오는 길, 채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에 홀린 듯하다. 

"왜 마이크를 들고 여기까지 오라고 한 거지?? 마이크는 갤러리 오프닝 때 필요한 건데 왜 가져오라고 한 거지?" 채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쏭달쏭해져서 마이크를 이리저리 뒤져보다가 어쩐지 가벼워진 것 같아 배터리 넣은 부분을 열어본다. 배터리가 없다!

채연은 그제야 동수의 장난에 속은 걸 눈치챈다. 

부글부글 화가 끊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채연이 넋 놓고 냉면 한 그릇을 먹는 동안 동수가 배터리를 빼간 걸 몰랐다는 사실에 좀 전에 피웠던 마리화나라는 것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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