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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Jul 24. 2018

입술을 깨물다

폭풍속으로

채연은 책상에 앉아 어제 했던 일을 오늘 다시 새로 하지만 계속 이어서 시작한다. 그런데 오늘은 상혁이 채연을 불러 세운다. 

"당장 내일 모레 스튜디오 촬영이 잡혔는데 왜 작가들이랑 스텝들이랑 모델들이랑 올 사람들한테 약도를 안 보내줬어??"

"네비에 주소 치고 오면 되는거 아니야?"

"약도 미리 그려놔야지, 그거 안 그렸어?"

채연은 속으로는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였지만 하지 말자고 스스로 결론을 내고 안했던 일이다.

'아무리 모든 일정 관리를 다 해주는 코디네이터 일이라지만 오시는 길 약도까지 세세히 알려줘야하는건가? 나도 맨날 헤매고 다니느라 택시 타는데 남을 위해 버스는 100번, 200번, 300번이 있고 지하철은 3호선 6호선 9호선이 있는데 1번 출구,5번 출구, 6번 출구로 나와서 100미터 직진을 해야하며 자가를 이용할 시에는 원효대교를 타고 오다가 한남오거리쯤  와서 주유소를 등지고 고등학교를 지나 메기 매운탕 집 옆 미니 스톱을 끼고 들어 오면 간판이 보인다라는 걸 일일이 다 알려줘여하는건가?'

하지만 채연은 말하지 않았다. 너무 속 좁아 보일테니까. 대신,

"이거까지 할 시간이 어딨어?? 나 어제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화장실 갈 때 빼고 오 분도 쉬지 않았거든?? 그러는 넌 뭐했니?? 넌 뭐했냐고!!!!"

상혁은 늘 그런 식이다. 채연이 화를 내지 않을 수 없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상혁이 뭔가를 부탁하면 채연은 상냥하게 그 부탁을 들어줬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아니 원하지 않더라도 솔선수범해서 나서서 일을 했다. 그런데 고마워하기는 커녕 상혁은 오히려 트집을 잡거나 잔소리를 했다. 그러기 시작하면서 채연도 막말을 하거나 화를 자주 내게 되었다.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다. 게다가 상혁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채연에게 말하지 않았고 언제나 바쁜 척만 한다.

채연이 놀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상혁은 채연이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도 꾸역꾸역 할 일을 마저 마치고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꾹 참고 7시가 땡하자 채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운동복을 챙겨 운동을 하러 체육관으로 향했다.


태권도장. 흰 띠 다음에는 노란 띄, 그 다음 초록 띄, 파란 띄, 빨간 띄, 밤띄, 마지막 고수가 검은 띄다. 

채연은 이제 겨우 흰노띄다. 그래도 제법 폼도 그럴 듯하고 앞 차기, 옆 차기, 찌르기, 막기, 등등 기합 소리에 맞춰 잘 따라한다. 어떤 사범님이 오느냐에 따라 자세가 좋아 질 때가 있기도 하고 대충대충 하게 될 때가있어 그 때마다 컨디션이 다른데 오늘은 가장 나이가 어린 새끼 사범님이 구호 소리와 함께 자세를 봐 주신다. 

하나 헛! 둘 헛! 셋 헛!


날씨가 더운데 여럿이서 구호까지 외쳐가며 운동을 한 차례하고 나자 땀이 송글송글 베어 나온다. 도복을 갈아 입고 채연은 도장을 나서는데 밖에는 비가 몰아친다. 

'아니 비 온다는 소리 없었는데.."

채연이 가지도 못하고 비가 언제쯤 그칠까 어쩌나 싶어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이 새끼 사범님이 도복을 갈아 입고 나왔다. 사범님은 항상 도복을 입을 모습만 봤는데 사복을 입을 걸 처음 본다. '아니! 이럴수! 사범님이 힙합 반바지를 입으셨네? 근데 종아리에 왠 문신이!@@ 사범님이 헐렁한 반팔티를 입으셨네? 근데 팔뚝에 왠 문신이!@@ 아니 사범님이 귀걸리를 하셨네? 왠 악세서리?@@'

채연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한 동안 사범님을 위 아래로 올려다 내려다 본다.

"우산 안 가져 왔죠? 전 저녁에 교회가는데 같이 갈래요?"

"교회요? 아, 네."

그러는 사이 사범님은 조그맣고 오래 된 낡은 모닝 차를 끌고 와 채연을 차에 태운다.

둘은 세차게 내리는 비를 뚫고 드라이브를 한다. 

교회가 왜 이렇게 먼 데 있지?? 이렇게 비가 많이 오다니 사범님이랑 같이 차를 타고 가면 안 되는데 하나님이 노하셨나 비가 이렇게 오다니...

채연은 한 편으로는 비에 쓸려 나갈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우당탕탕 시끄러운 빗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 없이 빗 속을 드라이브하는 스릴감에 미소가 번졌다.

"채연씨는 그림 잘 그리시는 것 같던데.. 이거 줄께요."

사범님이 차 트렁크에서 자기가 쓰던 건지 어디서 얻은 건지 모를 파스텔 한 박스를 채연에게 건넨다.

"아, 고마워요."

빗 속을 뚫고 차에서는 철 지난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oops, I did it again> 팝송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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