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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Jul 28. 2018

입술을 깨물다

있는 그대로


사실 상혁이 게이일 수는 없다. 채연은 곰곰이 앉아서 생각해 본다.

왜냐면 한 번은 초저녁에 만나 밤 새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침 해가 뜨는 걸 볼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채연은 분명 상혁이 옆에서 뭔가 꼼지락꼼지락 바지 쪽을 만지는 걸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술에 만취했기는 하지만 어렴풋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 상혁의 바지는 삼각 텐트를 치고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채연은 못 본 척 다시 잠에 들었는데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시체처럼 누워있었지만 머릿속에는 백만 가지 생각이 오갔다.  "너 왜 더럽게 고추를 만지는 거야?!" 아니면 "너 나랑 하고 싶어서 그러니?" 아니면 "내 앞에서 그러면 나 기분 나쁘니까 하지만!" 그도 아니면 "우리 한 번 할래?" 또는 "야! 그만 해!" 등등 혼자 끙끙 앓으며 무슨 말을 해야 싶어 고민만 하다가 날 밤을 새운 것이다. 


분명한 건 여자 앞에서 발기가 됐다는 건 있는 그대로 건강한 남자기 때문이다. 게이가 그럴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걸..... 걸. 걸. 걸. 생리학적을 아침에는 쉬가 마려워서 설 수도 있지 않나?? 


아~~ 모르겠다! 채연은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계속해야 한다니 스스로가 너무 저질이고 유치하고 수준 낮게 느껴졌다. 


그때 메일이 한 통 왔다.


귀사의 갤러리를 한번 내방하고 싶습니다. 작품이 있는데 전시 공간& 샘플 앨범을 찾고 있습니다.


일이다. 

맨날 상혁이에 대한 허구한 날 망상에 젖어 마음고생하기 싫었는데 그래, 차라리 일할 때가 세상 제일 속편 하다는 생각에 채연은 냉큼 답장을 보냈다.


고객님이 올 시간에 맞춰, 채연은 스튜디오 투어를 시켜주고, 사진 앨범 샘플을 보여주고,  계약서를 챙기고, 명함을 준비하고  또 뭘 더 준비하지?? 아! 책상 서랍에 쟁여 둔 쿠션 파우더를 한 번 두드리고, 립스틱을 바르고, 샤넬 향수를 한 번 뿌리면 준비 완료다. 있는 그대로도 예쁘지만 거기에 뭔가 인위적인 노력은 플러스알파가 되니까라고 굳게 믿으며 채연은 왠지 마음이 설렌다. 


그때 척척 채연 앞으로 걸어 들어오는 한 남자, 저 사람은 나이가 어리다. 메일에선 분명 젠틀하고 사무적이고 에지 있는 코발트블루 조지아 글씨체였는데 댄디 캐주얼에 군대도 아직 안 다녀왔을 뽀샤시한 미소년이다.

채연의 눈 동공이 저절로 커지고, 곧이어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면서 커피를 한 잔 타기 위해 탕비실 쪽으로 몸을 돌리자 손님이 묻는다.

"커피 타시게요??"

채연은 깜짝 놀라 되묻는다.

"시원한 음료수 좀 드릴까요?"

"마시고 왔어요. 그냥 안에 좀 볼 수 있을까요?  

"아~, 작품은 얼마나 있으신지요? 언제 전시하시려고요?"

"좀 커요, 그런 건 아직, 내부 크기만 보려고요."

"그럼 계약서 써드릴게요."

손님은 채연이 재빨리 계약서를 가져와 간단한 공간 임대 사항에 대한 안내와 더불어 금액을 기재하자 묵묵히 보다가 묻는다.

"근데, 계약 변경 사항이 생기게 될 경우엔 어떻게 되죠?"

"왜요? 조율해 보다가 영 안 맞으면 할 수 없죠, 일단 예약 넣고 다시 빼실 수도 있지만.... 그럼 진짜 왕 싹수없는 거죠. 간 보는 것도 아니고요."


손님은 채연의 사이다 같은 속 뻥 뚫린 있는 그대로의 말투에 깜짝 놀라 손을 덜덜 떨며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아~싸! 오늘 한 건 했네. 채연은 '황규석'이라고 계약서에 적힌 이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전시가 있는 날까지 앞으로 몇 번 더 볼 일을 생각하자 눈에 절로 불이 켜진다. 좋아하는 노래는 뭔지, 형제는 어떻게 되고, 사는 데는 어디고, 여자 친구는 있는지 없는지, 나이는 몇 살인고, 하는 일은 뭔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런 걸 일일이 물어볼 순 없고, 하지만 어쩐지 알 것만 같다. 


"그럼 우리 다음에 또 보죠. 연락할게요."

채연이 당당하게 다음 약속을 말하자 규석은 쏜살같이 자리를 황급히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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