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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Aug 01. 2018

입술을 깨물다

역주행

여행이라면 응당 행복하고 즐겁고 마냥 천국같아야만 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채연은 친구들과 부산을 다녀오고 나서 오히려 찌들었다. 땀 때문에 찌들었고 태양 아래 많이 걸었더니 온 몸이 쪼그라든 것 같고 신경을 썼더니 심장이 타들어 가는 듯 뜨겁다. 


안되겠다 싶어 채연은 집에 돌아오자 마자 특별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일단 머릿결을 매끄럽게 만들기로 했다. 부엌으로 들어가서 싱싱한 커피 원두를 글라인더에 넣고 들들 갈고 빈 통에 올리브 오일, 꿀을 넣고 섞었다. 욕실로 가서 머리를 감고  용액을 머리에 바르자 커피향이 은은하게 코를 찌른다. '진짜 머릿결이 좋아질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커피향은 감미롭군.' 꿀 때문에 머릿 속도 달콤해지고 기름칠을 했으니까 팽팽 돌아가는 것까진 바라지 않겠다고 채연은  눈초리를 매섭게 치켜세웠다.


곧이어 냉장고에 고이 모셔놨던 앰플을 꺼내 얼굴에 죽죽 손가락이 부러져라 문질렸다. '피부가 탱탱해질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쭈글쭈글해진 마음만은 구김이 사라질' 것 만 같았다. 


그리고 또 다시 책상 앞에 앉으니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다. 전 세계가 전쟁을 치루고 있더라 해도 멜로디를 치는 피아니스트만은 오직 감미로운 떨림을 홀로 느끼며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전화벨이 울렸다. 

"야, 너 사무실 안 나와?? 내일 갤러리 오프닝인거 알아 몰라?? 와서 좀 물이라도 날라야지~~"

상혁이다.


"나갈려고 했지, 당근 알지, 지금 휴대폰 충전하고 있어. 배터리가 없어서. 그리고 물은 말이지, 그걸 내가 왜 해??"

"다 너 돈 벌게 해주려고 이러는 건데, 알바비라도 안 벌거야?"

"참 나, 그래 나 돈 없는 거 어떻게 알고...바로 나갈께...흐흐흐."


채연과 상혁은 분명 친구사이였는데, 아니 썸 타는 사이였는데, 아니 상혁이 채연을 졸졸 따라 다니던 사이였는데...이건 마치 보스와 부하 직원 사이가 된 기분에 채연은 잠깐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아닌데....쟤는 코찔찔이 였는데...분명히 내가 훨씬 잘 나가는 A학점인데...쟤 과제 내가 도와 줬는데...왜 쟤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거지?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내가 이렇게 쩔쩔 매야하지?? 상혁이 쟤가 그렇게 대단한 놈인가??? 언제 저렇게 큰 거지?? 뭘 믿고 땅땅 거리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인줄 알았는데 아닌 척 하네????'

하지만 중요한 건 당장 이번 달 카드 값을 내야한다는 생각에 머리를 세게 가로지르고 채연은 부리나케 나갈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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