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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May 18. 2016

먹는 여자

절제와 까르보나라

처음부터 아람이 욕심을 낸 것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아람은 아이들을 막 키웠다. 울음을 안 그치는 우희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냅다 팽개치고 오락을 하기도 했다. 수저를 잡아 본 적 없는 우희에게 이유식을 떠먹여 줘야 한다는 것도 몰라 반을 흘려도 아람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그러던 아람이 이제는 초스피드로 목욕을 시키고 로션에 오일까지 능숙하게 바른다. 기저귀를 입힐 때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고 외출할 때는 도시락을 알차게 싸가지고 나가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젠 어린이 집 친구들 사이에 왕따를 당하지는 않을까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기 위해 등원할때면 패션에 신경을 쓰게 됐다. 처음 내복 패션에서 청바지, 그다음 드레시한 치마에서 또 북유럽 스타일로, 그러다 요샌 올가닉 개량 한복에 까지 이르렀다.  

엄마들끼리는 모이면 주먹밥을 먹이면 애가 잘 먹는다거나 육수를 우려내어서 국물을 내야 그나마 입에 댄다는 정보를 주고받다가도 어느 새 경쟁 심리가 조성되면서 초강력 물티슈로 바닥 곳곳을 소독해야 한다거나 TV를 보여주면 발달 장애를 일으키니 멀리해야 한다는 식의 끊임없는 주의를 주게 되었다.  

어느 새 아람은 이 모든 것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어제 걸려 온 한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차 좀 빼주세요. 차를 이렇게 대면 어떡합니까?"

낯선 남자의 다짜고짜 따지는 말투에 아람은 기분이 상했다.

"거기 다른 번호가 하나 또 있을 텐데 그쪽으로 연락해보시겠어요?"

"지금 전화받으신 분이 차 주 아니에요?"

"전 와이프고 남편이 차를 가지고 나갔어요."

"3264 아니에요?"

"맞아요. 거긴 어디예요?"

"그쪽은 어딘데요?"

"아니 그거 왜 물어보세요?"

"그린 빌라..."

수화기 너머 나이가 쉰 살은 넘었을 할아버지는 계속 말을 이으며 전화를 끊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종료 버튼을 눌러 끊어버린 아람은 여전히 남자의 칼칼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의혹에 쌓여 아람은 인터넷 검색창에 그린 빌라를 쳐보았다.

방배동 그린 빌라.

아람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남편이 그 곳에 갈 일이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바람피우는 건가? 며칠 전 남편은 허리와 하체 강화 운동에 관한 웹사이트 기사를 읽다가 아람에게 들킨 적이 있다. 그땐 아무 말 안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뭔가 의심스러웠다.

"남편이 바람피우면 어쩌지?"

"난 그냥 마음을 비웠어. 나 모르게 만나는 건 눈 감아 줄 수 있어."

"정신적으로 사랑에 빠진 건 곤란해."

"맞아. 그럼 정말 배신감 들 것 같아."

  아람은 며칠 전 친구와의 전화 통화가 생각났다. 아람은 남편과 대화를 나눈지도 너무 오래라 이제는 대화를 하는 것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어쩌다 같이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아람은 남편이 너무도 못생겨 보여 같이 다니기가 창피할까 봐 선글라스를 씌웠다. 툭하면 무시하고 소리 지르고 화를 냈다. 물론 처음부터 아람이 그런것은 아니었다. 남편을 처음 소개로 만났을 때 아람은 강박을 느꼈다.

"술 마시러 가요."

아람은 차를 마시고 난 뒤 말했다.

"술은 좀 그런데..."

"영화 보러 가요"

아람은 또다시 요청했다.

"그냥 술 마시러 가죠."

사케를 한 병 마시고 나와서 아람은 또 요청했다.

"맥주 마시러 가요."

맥주를 마시고 나와서 아람은 또 요청했다.

"커피 마시러 가요."

"밥 사주세요."

그렇게 아람은 우현과 헤어질까 봐 조바심을 내며 계속해서 졸랐고 그럴 때마다 우현은 거절하지 않고 아람이 하자는 데로 다 해주었다. 아람은 키가 큰 우현의 눈을 보려면 고개를 바짝 뒤로 제치고 올려다봐야 했다. 하지만 사년이 지난 지금 아람은 우현을 큰 아들이라고 부르며 있는 대로 구박을 했다.

극성 엄마와 악처가 된 것이 어제의 전화를 불러들인 것일까 아람은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억울했다. 그녀도 엄연히 여자이고, 또 한 번 사랑에 빠지고 싶은 살아있는 감각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아람은 북촌로 가회동에 봐 두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골목 한 어귀만 돌아서도 유럽의 맛을 내는 맛집이 나타났다. 아람은 안 쪽으로 한 번 더 들어 가 까르보나라와 샐러드를 시켰다. 얼마만에 먹어보는 파스타인지 몰랐다. 한 끼만 먹어도 한참이 지나서야 배가 꺼질 만큼 든든한 음식이다. 그제야 아람은 남편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가 생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람은 일거리를 찾기로 했다.

번역.

마침 4페이지 분량의 교차번역이 아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람은 좀 덜 극성인 예전의 나쁜 엄마가 다시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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