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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May 03. 2016

먹는 여자

콩기름과 밀크티

큰 건을 하나 해치우긴 했는데 그 이후에 남은 잔재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아람은 깨달았다. 켜켜이 쌓여있던 오래된 종이들은 습기를 먹은 채 시커멓게 눅눅해져 있었고 묶은 때들이 갈라진 틈 사이로 찌들어서 쾌쾌한 냄새를 풍겼다. 아람은 쓰레기를 내버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이불보를 뜯어 탁탁 털고 햇볕에 말렸다. 하얀 면포가 거뭇거뭇해진 베갯 잎에서도 알싸한 곰팡내가 나는 것만 같았기에 아람은 커버를 벗겨 빨래를 했다.


난지도 마냥 수북했던 잡동사니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찾아가고 마룻바닥이 보이기 시작하자 등은 거북이처럼 딱딱해지고 목이 돌아가지 않더라도 얼른 서둘러 치우기로 마음먹고 아람은 야무지게 손을 놀리며 설거지를 한다. 오전 10까지 아이들이 어린이 집으로 가고 나면 막내 우정이를 데리고 오는 오후 3시까지 5시간이라는 황금 같은 혼자만의 시간이 확보가 된다. 아무리 청소가 많다고 하더라도 부지런을 떨면 한 두 시간만에 대충  마칠 수 있다. 게다가 FM 박명수의 라디오 쇼를 듣다 보면 힘든지 모르고 너끈히 해치울 만도 하다. 12시까지 청소를 마치게 되면 남는 두세 시간 동안은 밥도 챙겨 먹고 여유 있게 차를 마시며 책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꼬박 꽉 채워서 내내 치웠던 것이다. 5시간을 내리 청소를 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꽃이 피고 지는 것만큼이나 치웠다 어지럽혀졌다 하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 변화이기에 그 잡아먹힌 시간이 티도 나지 않는다. 어쨌든 쾌적해진 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오면 피곤에 지친 채로 2부가 새로이 시작된다. 밥도 해 먹이고, 블록 쌓기 놀이도 옆에서 놀아 주고, 늦은 밤 동화책까지 읽어 주려면 고로 중간 인터미션이 없는 풀가동은 좋지 않다, 아니 위험하다. 반드시 사고가 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람은 저녁 7시가 되자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다가 바닥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우정이가 아람의 등에 올라 타 머리를 잡아당기지만 이미 잠에 취해 아픈 감각은 희미하다. 우희가 온몸으로 엉덩이를 누르며 칭얼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엄마 자지 마~!" 아람에게는 청각도 마비가 버렸고 그 소리는 자장가로 들린다. 얼마나 잤을까? 아람은 꿈속에서 생각한다. '지금 일어나야 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 내가 자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뭘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해!' 아람은 번쩍 눈을 뜨고 일어아 아이들을 부른다. "우희아! 우정아! 뭐해!" 불길한 예감은 거의  적중한다. 조용하다니 분명 일은 벌어졌다. 우희와 우정은 부엌 바닥에 앉아 기름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손으로 미끄덩거리는 기름을 줍느라고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튀김을 만드느라고 썼던 얼마 남지 않은 콩기름을 아래 찬장에 넣어 둔 것 화근이었다. 그나마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바닥에 엎어진 채 커다란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우희와 우정이 입고 있는 옷은 도저히 빨래를 한다고 해결될 지경이 아니었다. 일단 옷을 벗겨 뚝뚝 떨어지는 기름을 뭉쳐 쓰레기 봉지에 담고 아이들을 방 안으로 대피시켰다. 아람은 기름을 걷어 내느라 미친 듯이 바닥을 닦았다.  얼마가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기껏해야 20분이었겠지?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저 방까지 이어진 끈적거리는 기름 발자국을 지웠다. 시간이 멈췄다가 다시 흐르는 것만 같았다.  


아람은 오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두 잔 마시고, 비타민을 한 잔 마셨으니 더 이상 무슨 음료수를 더 먹어야 할지 몰랐다. 갈증으로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기름 냄새가 온몸에 나는데 과연 물로 닦일지가 의심스러웠다.  이런 때 제일 힘든 건 불현듯 찾아오는 외로움이다. 아무도 내 대신 이걸 치워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누구도 날 위로해 줄 사람도 없다. 딸 우희가 잘못한 걸 알고는 혼날까 봐 무서워서 소리 높여 운다. 우정이도 언니 옆에 따라 운다. 아이들은 도대체 얼마나 운 걸까? 아람은 두 딸을 달래 줘야 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딸들을 혼내는 것까지 해야 한다. 


대충 기름기를 닦아 내고 아람은 포트에 물을 따라 데우고 홍차 티백을 깡통 상자에서 하나 꺼냈다. 뜨거운 물을 붓자 붉은색 물이 우러나온다. 우유를 조금 따르고 꿀을 꾹 눌러 짰다.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아람은 브라운 색의 밀크 티를 만들었다. 다행히 빵 과자를 넣어 둔 봉다리에 스펀지케이크가 하나 있다. '단 거 먹고 나면 금세 괜찮아질 거야' 아람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스펀지케이크를 뚝 떼어 밀크 티에 담그고 한 입 먹고 나니 언제 그랬내는 듯 처참한 기분은 곧 우아해졌다. 


꼬장꼬장 찌든 때가 낀 뻑뻑하게 마른 마룻바닥에 기름을 묻혀 물걸레 질 하고 나면 스펀지케이크처럼 촉촉해질 수도 있다고 아람은 생각한다. 곰팡이 제거 마무리로 이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지 모른다는 초긍정 착각마저 든다. 어쩌면 잘 된 걸 지도 모른다. 우정이가 매번 장난감을 입으로 가지고 가서 아토피가 생겼을지 모르는데 이 번 기회에 깨끗이 닦아 놓으면 혹시 없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람은 대야에 물을 받아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장난감을 쏟아붓고 휘 헹궈서 키친타월에 건져 올린 뒤 하나하나 물기를 닦기 시작했다. 손 때가 묻어 있던 먼지 앉은 소꿉놀이 장난감들은 구멍이 숭숭 뚫린 바구니 안에 점점 수북이 쌓여 새 것처럼 하얗게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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