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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May 05. 2016

먹는 여자

개미와 크림치즈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받을까 말까 하다가 아람은 죄지은 것도 없는데 못 받을 것 뭐 있나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린이 집에서 우희의 어린이 집 등록을 위해 서류를 구비해 오라는 전달이었다. 오늘은 동사무소를 가야 할 것을 생각하니  할 일이 하나 더 추가되었구나 귀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아침부터 누군지 짐작이 간다. 오전 9시부터 택배 아저씨가 올 리는 없다. 우체부 아저씨였다. 벨이 울리는 사이에 아람은 집에 없는 척 쥐 죽은 듯 미동 없자 벨 소리도 멈춘다. 괜스레 희미한 미속 비져 나왔다, 그렇지만 아주 잠시, 엘리베이터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저벅저벅 군화 신은 남자의 발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초인종이 딩동 울린다. 아파트 밖에서 누군가 문을 열어준 모양이다. 아람은 이번에도 태양을 피할 길 없다고 체념을 한 후, 대뜸 무서울 게 뭔가 강도도 아닌데 까짓 거 아무렇지 않게 태연한 척 현관 손 잡이를 눌러  돌렸다.

"배우자 되세요? 여기 사인해 주세요"

끼어들기 금지 구역에서 반칙을 하고 카메라에 찍힌 우현의 차 번호에 벌금을 내라는 경찰서로 부터의 우편 통지서를 아람은 뜯어보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감사합니다".


그럴 때마다 아람은 이렇게 밖에는 달리 좋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 과속하면 위험하니까 조심해야 하고 신호 위반하다 사고 나면 합의금 줘야 하니까 조심해야 하고 끼어들면 뒷사람한테 예의에 어긋나는 거니까 하면 안 되는 거잖아! 이렇게 친절하게 저 멀리 다른 지역 경찰서에서부터 편지로 알려주니까 고맙지 고마워!!' 아람은 벌써 요 달 들어 날아온 벌금 고지서들을 들춰보며 끊어 오르는 화를 삮혀본다. '참자 참어! 매번 화내는 거 지겹다 어차피 말해도 듣지도 않을 건데 뭐' 아람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우현에게 전화를 건다.

"너 낼부터 차 가지고 나가지마!!"

다짜고짜 심한 소리를 한 것 같아 찜찜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독하게 책상 앞머리에 앉아 아람은 납부 영수증들을 정리해 본다. 쌀 값, 보육료를 부치고 집을 나선다. 집에 프린터가 없어서 아무래도 동사무소를 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바둥바둥 마을버스 타는 돈도 아까워서 걸어 다니는데 우현은 기름을 땅에 붓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연말 정산하면 벌금으로만 프린터도 사고 우희 자전거도 사주고 우정이 미끄럼틀도 사줬을 텐데란 기본적인 억울함도 이젠 들 지 않는다. 그만큼 이젠 아이 둘을 이고 지고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쯤 예사가 되어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아람이 동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아주머니 한 명이 스프링처럼 뛰어나와 맞이한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가족 관계 증명서 떼려고요"

아람은 동사무소 직원인 듯한 여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지만 아무리 봐도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로만 보일 뿐이다.

"여기 이걸로 하면 돼요, 도와 들게요."

아주머니는 아람의 손을 덥석 잡더니 엄지 손가락을 무인 기기 앞 지문 인식대에 얹어 준다.

"그냥 창구로 가서 떼야할 것 같아요, 지문 인식이 잘 안되더라고요"

아람이 엄지 손가락을 이리저리 대보았지만 신원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뜨자 안 쪽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아주머니는 막무가내로 다시 해보자고 우긴다.

"무인 자동 기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동공 같은 걸로 대체를 하던지 해야지 아무리 해도 안돼요".

아람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하며 홱 돌아 섰다.

좀 전의 아주머니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아주머니이다. 푸근해 뵈는 인상은 같지만 같은 파마 헤어 스타일이라 하더라도 길이가 좀 더 길고 입술은 더 빨갛고 안경을 썼다.

"뭐 필요하세요?"

창구에 서서 아람은 재빨리 어린이 집에 증빙할 가족 관계 증명서를 떼러 왔다고 말했다.

"그런 건 무인 기기로 하면 돼요"

"설거지를 하도 많이 해서 그런지 지문이 지워졌나 봐요. 아무리 갖다 대도 인식이 안 돼요. 시스템을 동공 인식으로 바꾸던지 해야 될 것 같은데요?"

안경 아주머니는 아람의 엄지 손가락을 만지작하면서 정 중앙에 잘 갖다 대보라고 시킨다.

"이거 여기서 떼면 천 원이에요, 무인 기기로 하면 공짠데요."

아람은 지갑에서 천 원을 꺼내면서 손가락을 호호 불며 다시 한번 시도해 보지만 역시나 되지 않는다.

"어제 한 분은 하도 안되니까, "

아람이 중간에 말을 끊는다.

"기계를 부쉈나요?"

안경 아주머니는 말을 잇는다.

"화를 엄청 내시더라고요, 몇 시간을 하시더니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어디 해보자 그러시더니 끈질기게 계속하시고는 결국 뽑아 가셨어요."

"결국 인간이 기계를 이기는 거군요! 역시~ 감동적이네요"

아람은 요새 인공지능 알파고를 이긴 이세돌 생각이 나서 어둘러 대자 안경 아주머니도 지지 않고 격려를 한다.

"무한 도전!" 

아람은 이번에도 할 말을 잃은 채 감사하다는 대답을 하고 냉큼 천 원을 던지듯 동사무소를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인 기기 시스템은 알파고의 친척쯤이 분명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담에는 여유 있게 가서 몇 시간 동안 천 원을 아끼기 위해 지문을 끊임없이 대 봐야 하는 것인가란 고민을 하며 아람은 우희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우희는 집에 가기 싫어한다. 언제나 선생님 손을 잡고 나와서 놀이터를 맴돌며 그네를 타겠다고 떼를 쓰는데 아람은 우정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넋 놓고 있을 수가 없다. 그때 아람보다 더 바쁜 한 애 엄마가 아이를 달래고 있다.

"영찬아! 집에 가자! 개미도 집에 간대~!"

아람은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저도 모르게 화가 났다. "쳇!"

옆에서 또 다른 애 엄마가 아람의 편을 들어준다.

"안녕~ 우희야! 친구는 놀다 갈 거래, 같이 미끄럼틀 탈까?"

우희와 수민이, 애들은 신이 나서 까르르 웃으며 미끄럼틀로 뛰어간다.

아람은 가방에서 쿠키를 꺼내 방금 미끄럼틀을 타고 온 수민이에게 하나 건넨다. 수민이 엄마가 쿠키를 반으로 쪼개 수민이에게 반만 주며 나머지 반을 빼앗아 먹고는 쿠키 가루를 바닥에 뿌린다.

"부스러기는 개미 주자! 개미도 먹어야지!"

아람은 또다시 개미 소리를 듣자 기분이 상한다.

그때 수민이가 미끄럼틀에 머리를 부딪히려고 하자 아람이 때를 놓치지 않고 주의를 준다.

"수민아! 조심해야지!"


아람은 유모차를 밀며 집으로 가는 길에 생각한다. 90년대에 한창 읽었던 프랑스 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처녀작인 <개미>에선, 개미에도 종류가 무척 많았다. 여왕개미, 수개미, 병정개미... 그 내부의 조직력이란 어마어마한 것인데, 그래 봤자 개미 아닌가 하고 무시할 만한 정도가 아닌 것이다. 아람은 뭔가 부드러운 걸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람은 냉장고를 열고 만들어 놓은 수제 요거트를 꺼내 커피 필터지에 붓고 유청을 걸어 냈다. 그리고 옷장 서랍에서 비스킷을 꺼내 크림치즈를 듬뿍 발라 한 입 베어 먹었다. 

'개미도 크림치즈 바른 비스킷 먹는다고! 여왕개미라고!'

아람은 비스킷을 하나 더 꺼내 또 한 번 크림치즈를 듬뿍 발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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