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분위기 인민이 되어 버렸다.
"국적이 왜 그래?"
장장 3개월 만에 비자를 받았다고 자랑했더니, 남자 친구가 국적이 이상하다고 했다. 비자 카드를 다시 보니 국적이 PRK라고 되어있다. 내가 알기로 PRK는 People's Republic of Korea, 즉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다. 내 국적이 북한이라고? 여권도 내고 오프라인 자필 서류를 제출한거라서 내가 고의로 잘못 썼을 리도 없는데,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라서 당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일단, 헛웃음만 나오는 와중 인터넷을 뒤적여보기로 했다. 하지만, 라이언에어 항공권 발권 시 Korean 다음의 괄호가 안 보여서 북한을 선택해서 문제가 됐던 사람들은 있어도 나처럼 비자에 문제가 발생한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다.
일단 나는 어이가 없어서 눈은 울고 입은 웃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독일 동기들은 신종 인종차별 아니냐며 굉장히 노발대발했다. 아직도 이렇게 무식한 사람이 자기네 나라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면서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소리를 질러주겠다고까지 했다. 그러면서 독일 행정 직원들은 관료주의가 심각하고 일 못하는 걸로 원래 유명하다고 자기들이 더 화를 냈다. 하다못해 교수님까지 그런 실수는 있어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 굉장한 안타까워하셨다. 원래 주변에서 더 화를 내면 내 화는 상대적으로 조금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일단 플랫 메이트에게 독일어로 오피스와 전화통화를 요청했다. 담당 외국인청 직원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거주 등록할 때 시청에서 국적을 북한으로 등록했다. 우리의 시스템에는 거주 등록된 정보가 연동되기 때문에 그대로 비자 발급이 되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다시 외국인청에 방문해달라."
미안하다는 말도 한마디 안 하고, 유감이라는 말도 없다. 다만, 플랫 메이트에 따르면 직원들이 자기들도 어이가 없는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하면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독일에서 평생 살고 있는 다른 한국 친구가 독일 사람들 서로 은근히 잘못 미루고 이런 일로는 사과 안 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했는데, 내가 직접 겪게 되니 참 씁쓸했다. '나'와 '그들'을 나누지 않으려는 내 노력이 무색하게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경험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우리는 이렇고, 그들은 그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약속을 잡았던 그 날이 왔고, 나는 외국인청에 다녀왔다. 여권을 확인하고 지문만 찍으면 돼서 2분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다. 나의 실수도 아니고, 더군다나 있어서는 안 될 실수 때문에 나는 수업도 있는 날인데 새벽에 일어나서 트램을 타고 왕복 30분을 이동해야 했고 물론 트램 비용도 지불해야 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에 소요된 내 시간과 감정과 돈은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고, 미안하다는 말도 못 들었다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내 정보가 북한 대사관에 넘어간 것은 아닐까? 시청 직원은 한국이 분단된 줄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아시아 사람들은 다 같은 아시아 사람일 뿐이라고 보는 신종 인종차별이었을까? 사실 지금까지 만났던 시청과 외국인청의 담당자들이 모두 비교적 친절한 편이어서 나쁘게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여전히 나는 북한 국적으로 발급받은 비자로 체류 중이기 때문에 상당히 찝찝하지만, 주변 친구들이 두고두고 놀려먹을 일이 하나 생겼다는 것에 만족(?)하고 끝내려고 한다.
'혼돈의 비자 수령기'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