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FJ 문과생과 ISTP 공대생의 연애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어 예쁘다!”하고 카메라를 켤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성재는 ‘저게 뭐가 예뻐?...’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면서 입으로는 “그렇구나”라고 해준다.
(얘가 제일 많이 하는 소리다)
예전에는 그런 말이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넌 나랑 취향도 생각하는 것도 전부 다르다고,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어떻게 계속 만날 수 있겠냐고 불평불만을 토로하곤 했었다.
물론 연애 8년 차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또 한 번 정말 다르다는 것을 느낄만한 사건이 있었다. 그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이 내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비 오는 날과 무척 잘 어울리는 색감에, 유난히 얼기설기 섞인 전선들과도 꽤 그럴듯하게 어울렸다.
직업이 에디터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난 어떤 장면을 보더라도 프레임을 얹어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저 장면이 종이로 인쇄되었을 때 얼마나 멋지게 나올까? 색감도 곧잘 어울리고 구도도 완벽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 적절한 구도라고 생각이 되면 카메라를 켠다.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을 보고도, 난 어김없이 멈춰 서서 카메라를 켰다.
- 오 지금 저기 예쁘지 않아? 빗소리랑 잘 어울린다! 영화에 나올 것 같아.
어차피 돌아오는 답은 또 “그렇구나”일 텐데 뭐하러 물어봤지? 빨리 찍고 가던 길 가자,라고 생각할 찰나.
- 저 글자가 예쁜 거야? 아니면 전봇대?
라고 묻는 게 아닌가(!) wow, 네가 그런 걸 물어본다고? 드. 디. 어 너에게 0과 1 말고도 다른 값이 생기는구나. 8년간 정해진 말만 하는 AI인 줄만 알았는데, 역시 뭔가를 알아챈 거지? 너무 기뻐서 방방 뛰기까지 했다.
나름 기대에 찬 채로 그냥 느낌이 좋아서 물어봤다고, 혹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되물었다. 그러면 당연히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진짜 비 오는 날과 잘 어울린다고 말해줄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반짝반짝한 내 두 눈을 비웃기라도 하듯, 보기 좋게 예상을 빗나갔다.
- 아니. 그냥 하나도 안 예뻐서
참 나.
아니 그럼 왜 물어본 거야. 그냥 평소처럼 “그렇구나”만 하지. 진짜 안 맞네.
허탈함을 느낄 틈도 없이 웃음부터 나왔다.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는 애인의 얼굴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그럼 그렇지 뭐, 됐고 집에 가서 김치찌개나 먹자며 마무리 지었다는 감동적이지 않은 이야기.
그래도 우린 같이 김치찌개 먹으면서 구해줘 홈즈 보는 걸 좋아하긴 하니까. 그거면 됐지 뭐?
애써 먹을 걸로 화를 눌러 담았다.
P.S. 이 글을 다 쓰자마자 주문한 김치찌개가 왔다. 아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