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은 Jan 08. 2021

우리는 첫 만남부터 너무나도 달랐어

ENFJ 문과생과 ISTP 공대생의 연애


생각해보면 우린 9년 전, 첫 만남부터 전부 달랐다.

옷 입는 스타일도, 대화의 주제도, 서로에 대한 마음도 모두.


9년 전 21살 시절로 거슬러 가보자면,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또 내 약사 친구 덕분이다(내 브런치에 등장하는 그 친구). 한창 페이스북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라, 그땐 매일 붙어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가 대학교에 가서 어떤 애들이랑 어울리는지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어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까, 나 말고 친해지는 애들은 누구일까 궁금해서 친구 게시물을 관심 있게 보곤 했다. 난 자주 올라오던 친구들 사진에 잘생긴 애가 한 명 있길래 소개해달라고 졸랐다. 그게 성재였다. 성재도 내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었는지(하하) 소개를 받겠다고 했고, 그렇게 우린 만나게 됐다. 친구가 성재 번호를 주면서 했던 말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얘... 너랑 진짜 안 어울리는데? 성격도 완전 다르고 너 취향 아니야... 걔는 말을 하루에 1분밖에 안 해'


나는 오디오가 비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다. 사람들의 말에 하나하나 대답을 해주고, 꼭 큰 리액션을 한다. 정적 가운데 오는 어색함이 싫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신비감 따위는 없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남들이 나를 궁금해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나에 대해 말하는 스타일. 그래서 사실 학생이었을 때부터 소개를 받아서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기보다는 원래 알고 지내던 친구랑 잘되는 경우가 많았고, 소개를 받아도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늘 동성 친구같은 사이가 돼버리곤 했다. 너무 사람을 편하게 해 줘서 그런지, 나랑 있을 땐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미안하다던 친구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난 성재가 말이 없는 성격이라는 얘기를 듣고, 소개팅 전에 걱정을 좀 했다. 또 나만 말하면 어쩌지? 이번엔 적당히 말해야겠다. 그래도 정적은 너무 싫은데. 어떻게 하면 말을 하지 않고도 어색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면서. 그러다 좋은 생각이 하나 났다. 아, 잡지를 하나 가져가면 되겠다. 말이 없어지는 순간 잡지를 같이 보면 말을 덜해도 되잖아! 방에 있던(당시 유행하던) 패션 잡지(크래커)를 가방에 챙겼다. 그리고 걔는 공대생 이랬으니까 수학이랑 과학 이야기를 좋아하겠지?라고 생각해서 나름 과학 상식 같은 것도 공부한 것 같다. 평소에 궁금했던 걸(탄산음료 병은 왜 밑이 둥근지 알아? 같은 것들) 몇 가지 생각했다. 요즘에야 서로 인스타 보면서 넌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구나, 나도 이 카페 가봤는데... 따위의 말들로 시간을 채우겠지만 그때는 아니라서 저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준비했던 걸 수도 있다.


성재를 처음 만났던 날. 마주치자마자 나랑은 정말 다르겠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 난 지금 당장 홍대 놀이터에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옷을(체크무늬 레깅스 바지에+각종 액세서리) 입고 있었는데, 성재는 누가 봐도 옷에 관심 없는 사람처럼 입고 왔기 때문이다. 그때 나랑은 취향이 정말 다르다는 친구의 말이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갔지만, 표정으로 티를 낼 수 없으니 금방 잊고 크게 인사했다. 안녕. 내가 시은이야! 성재는 역시나 응, 안녕...이라고 힘없이 인사했다. 음 역시 말이 없구만. 다행히 예상했던 반응이라 놀랍진 않았다. 예상하지 않았더라면 무척이나 흥미가 없어 보이는 말투라 실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소개팅이니까(?) 양식을 먹어줘야 한다며 파스타와 피자를 먹으러 갔다. 성재는 묵묵히 토마토 파스타를 먹었다. 나는 나한테 궁금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성재의 태도에 조금 속상해지려고 했지만, 맛있는 피자를 먹고 있어서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우와 이거 맛있다! 파스타 좋아해?”

“음. 좋아하지는 않아.”

“아 그럼 어떤 음식을 좋아해?”

“딱히 엄청 좋아하는 음식은 없어”

“그렇구나”

-대화 종료-


절망적이게도, 우리의 소개팅은 대략 이런 분위기의 식사 자리로 시작했다. 난 금방 입과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다... 왜 대화가 이어지지 않지...? 결국 그 정적을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 이미지 관리는 포기하고 아무 말이나 뱉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이 없는 애라면 나랑은 진짜 안 맞겠구나 싶어서 대충 밥이나 빨리 먹고 헤어져야겠단 마음뿐이라 그랬다. 그래도 과학 상식 질문은 잊지 않고 했다. 어제 준비한 게 억울해서라도 꼭 해야겠다 싶었다.


성재는 카페에 가서도 똑같았다. 난 이 카페는 스무디류가 맛있다고 말하며 커피 스무디를 시켰고, 성재는 내 말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꿋꿋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이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래도 소개팅에서 상대방이 마음에 조금이라도 든다면 추천해주는 음료를 마시지 않을까? 스무디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내 말은 싹 무시하고 커피만 시키기는. 난 입이 댓발 나와서 속으로 진짜 커피만 마시고 집에 갈 거라고 수십 번을 생각했다. 물론 이때도 성재는 말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난 가져온 잡지는 펼쳤다. 어제 준비한 게 억울해서라도 꼭 같이 보기는 해야겠다 싶었다. 222


“나는 이런 스타일이 좋더라!”

“으응..”

“음 너는 어때? 이 중에서 어떤 스타일이 더 마음에 들어?”

“음... 이거?”

“오! 왜?”

“그냥?”

-대화 종료-


파스타 집에서의 절망은 카페에서까지 이어졌다. 진짜 예의 없어! 내 친구가 왜 내 취향 아니라고 했는지 알겠다. 뭔 애가 저래? 이렇게 한 마디도 안 할 거면 뭐 하러 소개팅에 나온 거야? 혼자만 말하고 에너지도 다 썼으니 일어나자고 해야겠다 싶었다. 곧이어 집에 가자고 이야기했고, 후련한 마음으로 가서 화장 지우고 야식이나 먹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갑자기 성재가 배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가자고 하더라. ??? 뭐야, 말도 안 할 거면서 아이스크림 가게는 왜 가? 솔직히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뭐... 처음으로 나한테 뭘 제안한 거니까 가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들어가서 나는 민트 초코를 시켰고(민초가 세상을 구한다 -민초단-) 성재는 슈팅스타를 주문했다. 이때 속으로 생각했다. 난... 슈팅스타를 제일 싫어하는데 입맛도 맞질 않네... 아이스크림을 싹싹 긁어먹은 성재는 그제야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지하철에서 인사를 하고 무미건조하게 헤어졌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수원에서 노원까지 와준 것도 신기하다).


근데 놀라운 건 이제부터다. 성재를 소개해준 친구한테 1시간도 안 돼서 카톡이 온 것이다. 보나 마나 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친구로 지내자는 말을 건네 한 것이겠지 생각했다. 그날 본 성재 성격이라면 나한테 대놓고 싫은 소리를 못 할 애일 테니까. 그런데 톡 내용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야! 얘가 너 좋대. 몇 번 만나면 사귀자고 할 것 같은데?”


와. 난 예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뭔 소리야. 대체 나의 어디가 마음에 든 거래니, 그다지 관심도 없어 보이던데. 따지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일단 참았다. 너무 궁금했다. 그 애의 머릿속이.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나중에 성재한테 들어보니까 배스킨라빈스도 헤어지기 싫어서 가자고 한 거라더라(!). 참 웃겼다. 나는 첫 만남에 파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얘는 나랑 사귈 마음을 먹었다는 게. 그렇게 세 번을 더 만나고 우리는 만나게 됐다. 이렇게 숫기도 없고 말도 없는 애가 사귀자는 말은 어떻게 했냐 하면.. 그것은 다음 편에서.


P.S.

성재랑 9년 동안 만날 수 있었던 비결: 남들은 처음부터 불타는 사랑을 했다던데. 우린 처음이 가장 잔잔했다. 서서히 예열되는 관계였던 걸까. 오히려 지금이 그때보다 더 따뜻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라도 괜찮아, 우리는 김치찌개를 좋아하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