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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은 Dec 10. 2020

인생에도 정체기는 갑자기 찾아온다

다이어트 정체기가 오는 것처럼

오래된 친구에게 카톡으로 SOS가 왔다. 자신의 인생에 정체기가 찾아온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내 어림짐작이었지만, 휴대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말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냥 힘들다고 하는 게 아니구나?


마침 나도 지하철을 꽤 오래 타야 하는 상황이었다. 적적하던 틈에 고민이나 들어줘야지! 평소 같았으면 이어폰 꼽고 유튜브를 봤을 텐데. 이건 이 친구의 고민을 잘 들어주라는 운명인 걸까. 우린 그렇게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얼마나 많이 말했냐면, 엄지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였다. 솔직히 내려야 하는 타이밍에 내리지 못할 뻔했다.


내 친구는 현재 약사다. 권 약사. 그 말인즉슨, 중학교 때부터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는 소리다. 수능을 치고 대학에 갔는데, 약사가 되려면 피트라는 시험을 또 쳐야 한다. 그리고 또 몇 년을 공부해서 약시를 본다. 약시까지 통과하고 나면 끝인가? 약사가 되어서도 계속해서 신약을 공부해야 한다고 하더라. 15년을 공부했는데, 앞으로도 공부해야 할 운명. 그렇게 약사가 된 지 2년이 되었는데, 갑자기 공허함이 찾아왔다고 했다.


"그래도 넌 네 인생에 전반적으로 만족했던 것 같은데. 아니야?"

내가 물었다.


"만족하지. 근데 이제 일도 지겹고, 큰 목표가 사라지니까 재미가 없다고 해야 하나. 요즘엔 다들 소소한 성취를 이루며 하루하루를 버틴다고 하던데. 나는 새로운 목표를 세워도 그저 그렇더라."

친구는 워낙 힘들다고 말하는 타입이 아니다. 자존감도 높은 편이라, 자신의 인생이 재미가 없다며 축 쳐져있는 모습이 처음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완전 인생 권태기 왔네. 연애를 해보는 건 어때? 너 연애 오래 쉬었잖아. 새로운 자극이 되지 않을까?"

이때까지만 해도 난 내 친구가 그저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있는 줄 알았다.


"연애도 내 맘대로 되어야 말이지. 그리고 솔직히 연애만이 답은 아닌 것 같아. 연애를 해도 재미없을 거 같아. 전체적으로 걍 노잼이야. 몰라."

이렇게 부정적인 애가 아니었는데. 이유가 뭘까?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늘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명탐정처럼 추리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1. 삶에 변화가 없다 2. 취미를 찾아보려고 해도 기력이 없다 3. 자극적인 사건도 없다 4. 인생에 큰 목표가 사라져서 무기력해지기만 한다? 아, 이거...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 다이어트 정체기랑 똑같은데?


“야 근데. 지금 네가 하는 얘기.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다이어트 정체기랑 똑같은 거 같아.”

위로랍시고 이딴 말을 했다.


8월부터 다이어트를 했다. PT 선생님과 운동도 하고, 식단 조절까지 하니 처음 7kg은 금방 빠지더라(워낙 많이 쪄 있었다). 그러다가 다이어트에 정체기가 찾아왔다. 운동을 두 배로 열심히 해도, 식단 조절을 더 잘해도 체중에는 변화가 없었다. 말 그대로 그냥 멈춘 상태. 더 이상의 목표도, 성취감도 사라지니 무기력해지기까지 하더라.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으니 자존감까지 낮아졌다.


사실 정체기는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겪는 일이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를 포기한다고 한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는데도 왜 변화가 없지? 왜 내 몸은 노력에 대한 보상을 주지 않지?라는 생각으로.


갑자기 찾아온 정체기는 당연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 어떤 것으로도 뿌듯함을 느낄 수 없으니까. 나 자신을 칭찬할만한 요소가 전혀 없으니까. 그렇다면 내 친구의 인생도 정체기 같은 게 아닐까? 대충 이런 말들을 친구에게 뱉었다.


“헐, 야. 진짜 맞는 것 같아. 인생을 다이어트라고 생각하면 쉬우려나. 근데 그 정체기라는 건 대체 언제 풀리는 건데?”

우린 각자 다른 정체기를 겪는 한 인간으로서, 심하게 공감했다. 이것도 어림짐작인데, 친구는 분명 아주 살짝은 웃었을 것이다. 얘 또 말도 안 되는 얘기 하면서 위로해주려고 하네. 그래도 들어나 볼까?라는 마음이었겠지. 어찌 됐든 상관없다. 조금은 내 얘기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으니, 이 틈을 타 얘기를 계속 이어 나가야 했다. 내 말을 믿어줄 때 더 치고 나가야 한다.


“있잖아. 정체기라는 건 크게 변화하려고 몸이 재정비하는 거래. 여태껏 달려왔으니까, 다시 달릴 준비를 하는 거지. 그래서 이때 오히려 치팅 데이를 가지는 게 좋다더라? 한 번쯤은 몸을 풀어주는 거지. 그러고 나서 다시 운동을 시작하면, 정체기를 극복할 수 있대.

다이어트 정체기는 사실, 몸이 다시 빠질 준비를 하는 거라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엔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유지만 하겠다고 마음먹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뭘 더 하려고 하면 지치기만 한다고.


난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네 인생도 그렇다고. 지금까지 힘들게 달려왔으니까 잠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음에 있을 재미있는 일을 준비하는 걸 수도 있지 않느냐고. 그러니 앞으로도 변화가 없겠거니 생각하며 동굴로 들어가지 않았으면 한다고. 지금까지는 거센 파도를 넘어야만 하는 삶을 살아온 네가, 잔잔한 파도를 만난 거라고. 그런 너의 삶에 적응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역시 너랑 얘기하면 재미있어. 내 인생을 지 다이어트에 비유하다니. 웃긴 건 위로가 됐다는 거야. 지금 나는 다시 다가올 재미있는 파도를 대비하기 위해 망망대해에 가만히 떠있는 거겠지? 준비가 다 되면 분명히 나는 다시 파도를 탈 거야."

그래! 그거야. 언젠가는 또 다른 일들이 예측 불가능하게 생기겠지. 아무 말도 없이 정체기가 찾아온 것처럼, 하루아침에 재미있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니까.


“갑자기 이런 얘기해서 미안한데. 나 내려야 돼. 다 왔어"

"우리 한 시간이나 얘기했네? 정체기 얘기를 이렇게까지 말할 일이냐? 얼른 들어 가."

“그래 나중에 다시 얘기해!"


친구랑 한 시간 동안 이런 얘기를 했다. 권 약사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바뀌게 될까? 그리고 나의 정체기 또한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둘 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이거 하나는 안다. 한 달, 일 년 동안 변화가 없을 수도 있다는 거. 하지만 그 언제가 될지 모르는 정체기에도 꼭 끝은 있을 거라는 것.

 

그리고 역시 친구랑 인생 얘기하는 건 짱 재밌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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