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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은 Aug 27. 2020

20년 동안 살던 집을 떠나며

집은 나에게 더 좋은 세상으로 떠나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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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이사를 가서 집을 정리했다.

약 20년간 살았던 곳이라 그런지 이곳저곳 내 흔적이 남지 않은 곳이 없었다.

버려도 버려도 더 버릴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이렇게나 많은 과거의 것들을 남겨두었었구나.

아깝다고 생각해서 20년간 차곡차곡 쌓아둔 것들인데 미련 없이 전부 버리는 데에는 고작 이틀이 걸렸다.

필요 없던 것들. 굳이 남겨두지 않아도 됐을 물건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버릴걸.


물건들을 하나둘 치우면서, 좋지 않은 기억들도 멀리 보내는 기분이 들었다.

다 버려도 된다고. 다시 새 물건, 새 기억으로 채우면 되는 거라고. 누가 허락해주는 것 같았다.

새로운 곳에 가니까 모든 걸 다시 사면된다는 생각에 후련해서 더 그랬나?


언젠간 쓰겠지 생각하며 모아 두었던 먼지 쌓인 쇼핑백들.

이젠 연락하지 않는 친구들과 찍은 32 분할 스티커 사진.

성공할 때만 기분 좋은 누군가 뽑아준 인형들.

옷장에 전시만 해두었던 안 입는 옷들.

전부 미련 없이 보내주었다.


나의 시간을 간직한 물건을 내 멋대로 내치는 것 같아서 솔직히 조금 찡하긴 했지만.

(토이스토리가 최애 영화인 나로선 정말 힘든 일이었다.)

집에 가는 길. 햇살 잘 드는 스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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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 대로 든 이 집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쁜 기억은 다 버리고, 마음에 좋은 기억만 채워가라고.

벽지는 찢기고 구석진 벽은 갈라진 모습을 하고 말이다.


벽지가 찢어진 이유는 다름 아닌 내 잠버릇 때문이다.

난 잠들기 전까지 발가락으로 벽지를 긁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발이 닿는 쪽의 벽지가 항상 찢어지곤 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울면서 잠이 드는 날에는 그 버릇이 더 심해져서,

스스로 ‘저곳을 더 괴롭힐 만큼 힘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다짐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내 방은 감추고 싶은 내 못난 모습까지 다 기억하고 있을 텐데.

내가 조금 더 깨끗하게 쓸걸. 험하게 다루지 말걸. 후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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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즘엔, 너무나 당연했던 시야를 눈에 꾹꾹 눌러 담아 본다.

영상으로도 남겨 보고, 괜히 잘 가지 않았던 베란다에도 들어가 본다.

심지어 집으로 가는 길도 하나하나 천천히 밟는다.

평소에는 너무나 당연했던 곳이라 사진 하나 찍지 않았었는데.


지금 와서 이런다고 이 집은 나의 이런 싱숭생숭한 마음을 알아주기나 할까.


집이랑 이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지난 시간을 떠나보내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가.

그렇게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아무래도 오래오래 그리워하려고 이러나 보다.


20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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