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은 Feb 02. 2021

절실하지 않아서 사랑이 아닌 줄 알았다

ENFJ 문과생과 ISTP 공대생의 연애

절실하지 않아서 사랑이 아닌 줄 알았다. 절실한 마음만이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덕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쟁취하려면 대충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지난 몇 년 간의 내 생각이었다. '이만큼 노력하지 않았는데 그걸 가질 자격은 없지. 절실한 마음이 있어야 되는 법이야... 그게 뭐든.'


내가 정의한 그 절실함은 사랑을 포함한 모든 것에 해당되었다.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정의 과제를 앞둔 상황에서도 절실하면 다 하게 되어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못할 건 없다고 여겼다. 사실 이 마인드가 좋게 작용할 때가 더 많기는 했다. 대학교를 다닐 때도, 대외활동을 하면서도, 취업 준비, 직장 생활을 할 때도 남들보다 배로 노력했다. 그래서 늘 내가 욕심을 낸 상황에선 남들보다 좋은 결과를 냈고,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강박이 생겼다. '노력하지 않으면 진짜를 가질 수 없어. 뭐든 치열하게 대해야 돼.'라는 못난 마음. 이런 생각을 나에게만 적용했다면 그저 '남들보다 조금 귀찮게 사는 사람'으로 비쳤을 텐데, 문제는 내가 아닌 남들을 볼 때도 그렇게 생각했단 거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못 하는 걸 남이 해냈을 때 나는 '저 사람은 뒤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나보다 몇 배는 더 노력했겠지. 그러니까 내가 못 하는 걸 해낸 걸 거야.'라며 부러워했고 그러지 못한 나 자신을 탓했다. 사실 이것도 백 번 양보해서 나를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 정도로 써먹을 수 있는 생각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내가 노력해서 해낸 것을 남들은 해내지 못했을 때. '나만큼 절실하지 않아서야'라고 여겼다. 그렇게 세상을 각박하고 삐뚫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결국 나를 잡아먹는 습관이 될 거란 건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세상의 모든 실패를 '절실하지 않아서'로 치부한 것.
그게 내가 사랑에 서툴렀던 이유 중 하나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마음을 인간관계에도 대입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세상에서 가장 단정 지으면 안 될 '사람 마음'에다가도 그 꼰대스러운 잣대를 들이밀었다.


남자 친구가 날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하면, '쟤는 날 사랑한다면서 왜 나에게 무례하게 굴까? 그건 나랑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아서야. 나에 대한 간절함이 없어서지.'라고 생각했다. 나였다면 어떻게든 노력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풀어 주었을 텐데 상대방은 그렇게 하지 못 했으니 나만큼 절실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20대 초반, 바로 이런 이유로 남자 친구와 대판 싸운 적이 있다. 연인간의 싸움이 늘 그렇듯, 처음엔 사소한 싸움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나는 싸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휴학생(시간이 많았음)이었고, 남자 친구는 열심히 싸울 여력도 없는 시험 기간이었다는 사실이다.


딱 절망적인 타이밍 아닌가. 내가 여기서 절실함을 강요한다면 이것은 큰 싸움으로 번질만한 타이밍.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가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말자. 진짜 별로잖아'라고 했을 테지만, 과거의 나는 남자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랑 화해하고 싶고, 네가 진짜 나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하다면 시험공부를 포기하고 나한테 와줬으면 좋겠어"


이때 남자 친구의 태도 덕분에 나의 버릇을 고칠 수 있었다. 남자 친구는 딱 이렇게 말했다. "현실적으로 나는 내일 시험을 포기하고 너에게 갈 수가 없어. 내일 시험을 치고 가서 사과해도 될까?" 솔직히 그래도 됐다. 남자 친구는 수원에 살았고 나는 당시 노원에 살았는데, 지하철을 타면 2시간, 그러니까 왕복 4시간을 버려야 했다. 싸움이 일어난 시각은 새벽이었기 때문에 딱 몇 시간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남자 친구가 우리의 사랑에 절실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나였으면 택시를 타고서라도 왔을 텐데, 쟤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날 사랑하지 않아서 그래. 그만큼 노력하지 않아서야,라고 단정 지었다. 기어이 그가 여태 나에게 보여주었던 사랑까지 부정해버렸다.


꼭 절실해야만 사랑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싸움에서 나는 결국 졌다. '꼭 절실해야만 사랑인 건 아니야'라는 남자 친구의 말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남자 친구의 입장은 이러했다. 주어진 상황(=시험기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장문의 사과&전화) 나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는데, 나는 그 30분을 노력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상대적인 시간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싸움엔 결론이 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인 듯했다. 나는 휴학생이라 남자 친구보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그에겐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그에게 있어서 그 30분이 최소 30시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상황과 기준이 다른데 어째서 내 입장에서만 노력의 크기를 가늠했을까. 후회스러웠다.


'네 뜻대로 내가 시험을 포기하고 네가 원하는 그 간절함을 보여주었다면, 그것은 과연 해피엔딩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너에겐 이상적인 결론일지는 몰라도, 나는 아마 지쳤을 거야. 꼭 모든 상황에서 절실해야만 사랑인 건 아니야.'


그의 말이 맞았다. 그때 내가 당장 120을 보여 달라고 떼를 썼다면 우린 망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나는 그의 70을 인정했다. 30이라는 상황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상대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자주 마음의 크기를 비교한다


바로 이게 9년의 연애 끝에 찾은 답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 나는 할 수 있는데 상대방이 못 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그가 절실하지 않아서가 결코 아니다. 그 대신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 그럴 수밖에 없는 타이밍 또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상대적인 상황에서 자주 마음의 크기를 비교한다.


내가 만약 지금 20대 초반의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네가 보여준 모습이 지금의 너에겐 최선이겠지. 속상하지만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인 걸.'


그랬다면 나는 조금 더 빨리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조금 더 현명한 사람일 수 있었을지도. 꼭 나 대신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사랑인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또한 다행이겠지. 꼭 절실해야만 사랑인 거냐고 과거의 내가 묻는다면, 9년 뒤에 나는, 그것은 아니라고 대답해줬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