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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은 Jan 22. 2021

고속도로 주황 불빛 아래서 잠들면, 집에 도착해 있었지

이젠 집으로 데려다줄 엄마는 없는데

어렸을 땐 가족과 오랜 시간 차를 타고 이동한 적이 많았다.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 여름 방학 바다를 보러 가는 가족 여행, 할머니 집 가는 길... "유행가, 유행가 신나는 노래. 나도 한 번 불러본다~" 아빠가 휴게소에서 산 트로트 테이프에선 뽕짝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가끔 차가 막히면 답답함에 창문을 잠시 열고 닫았었는데, 그때마다 익숙해져 느끼지 못했던 모과 향이 코로 확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바깥공기에 비해 차 안은 뒷좌석에 둔 모과 향기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만약 향기가 눈에 보이는 물질이었다면, 그 시대 고속도로에는 모과 색 물감을 덧칠해놓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시절, 차를 오래 탈 일이 생길 때면 나는, 뒷좌석에 누워 고속도로 가로등 불빛을 보는 걸 좋아했다. 그땐 유튜브를 볼 스마트 폰이나 아이패드도 없었고, 책을 읽으면 멀미를 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가끔 연결 상태가 좋지 못한 시골길을 지날 땐 라디오도 끊기곤 했었다. 진짜다. 뭐 어쨌든... 특히 우리 가족은 엄마와 아빠의 고향인 순천에 자주 갔는데,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라 차가 막히면 서울에서 대략 6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서인지, 운전하는 엄마를 자주 보챘던 기억이 있다. “엄마 집에 언제 도착해?” 지금에야 드라이브를 좋아하지만, 왜 어릴 적에는 차 타는 게 그렇게 싫었는지. 한 시간도 지겨워서 징징대곤 했었다.


바로 이때다. 그렇게 보채다가 지치면, 가로등 불빛을 보는 거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 뒷자리에서 그 주황 불빛이 규칙적으로 아른아른 거리는 걸 보며 잠드는 게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언제 도착하는지 기다릴 필요도 없고, 고민할 필요 없으니까. 현실 감각을 잊기 위해선 잠에 드는 것이 정답이었다. 트로트 몇 곡이 끝나갈 즈음, 뽕짝 멜로디가 서서히 귀에서 흐릿해질 무렵, 그 주황색 불빛이 점점 검정 색으로 바뀔 때. 그때 다시 잠에서 깨면 익숙한 우리 동네가 보였으니까.



그때부터 버릇이 되었던 것 같다. 문제가 생기거나 힘든 일이 닥쳤을 때, 길을 잃었을 때. 나는 그냥 잠을 잤다.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면 우리 집에 와 있었던 바로 그때처럼. 잠시 세상에서 로그아웃하고 다시 시작했을 땐, 모든 게 해결되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심지어 이미 잠에서 깼는데 억지로 눈을 다시 감았던 적도 있다. 시간이 흐르기만을 바란 적도 많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없어졌네,를 시전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이제 나는 차 뒷자석에서 트로트나 들으며 한가하게 가로등을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나를 집으로 안전하게 데려다 줄 엄마는 없다. 아니, 있어도 없는 셈 쳐야한다. 이젠 아무리 걱정을 외면하려 눈을 감아 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젠 내가 운전석으로 가서 스스로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답이 없는 이정표를 보고서. 불행하게도 나에겐 아직 성능 좋은 내비게이션도 없는데 말이다.


엄마, 보채지 않을 테니까 이번  번만 운전해주면  될까?   잘게. 자고 싶어.’ 마음속으로 수백 번을 외쳐봤자 엄마에게 들릴  만무하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당연히 제자리라는 걸 깨닫기까지 왜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문제를 직면할 용기를 갖기까지 꼬박 서른 해가 걸렸다. 딱히 내 인생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요즘 들어 자려고 누우면 왜 이렇게 고속도로에서 봤던 가로등 불빛이 자꾸 아른거리는 건지.


‘언제까지 평생 뒷좌석에서 누워 편하게 지낼래?’ 덜컥 겁이 나는 나이. 어떻게 하면 옳은 길로 갈 수 있을까. 느려도 좋고 구불구불한 길이어도 좋으니, 안전하게 집에만 잘 도착해있다면 좋으련만.


오늘은 자고 일어나면 어디쯤 와 있으려나.

내일은 집이랑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이길.


다시 눈을 감아 본다.


2020.4월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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