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는 아들이다. 이건 석이가 나중에 큰 인물 된다는 꿈이야.”
할머니는 늘 그렇게 좋은 건 죄다 영석의 앞에 갖다 붙였다.
-김유담 ‘돌보는 마음’
손에 쥐어진 것은 5만 원권 2장이었다. 내게 차비를 하라며 그녀는 내게 돈을 건넸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무렵이었다. 초가을의 날씨는 아직 소년티를 못 벗은 스무 살 청년처럼 여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자꾸만 온몸에서 땀이 났다. 옷이 그대로 피부에 달라붙었다. 끈적거리는 가을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집. 어질러진 방을 청소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하러 나갔다. 평범한 일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집. 정돈되지 않은 기억을 치우고, 틈만 나면 장면을 데리고 도서관을 향했다. 자리에 앉으면 과거의 조각을 퍼즐처럼 꿰맞추기 시작한다.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는 말. 얼른 성공해서 효도하라는 말. 할머니는 언제나 사랑과 기대 그리고 부담을 쥐여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할머니의 기억은 한 시점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는 똑같은 대화를 수십 번 반복했다.
나는 얼기설기 모인 기억을 전당포에 글로 바꿔갔다. 종이 위에 찍힌 자국들이 보였다. 고스란히 담겨있는 고민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내 글을 본 선생님의 표정이 그대로 다가왔다. 그날 처음으로 타인에게 내 글이 닿을 수 있다고 느꼈다. 아니, 정확히는 생생한 기억과 감정을 기록하는 것은 누군가에게로 하여금 그 순간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떠난 날 즈음엔 언제나 아팠다. 분명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가슴 한구석에 타투를 새겼을 줄이야. 벗지 못하는 묵주반지처럼 그녀가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청년처럼 어리숙하게 군다. 기억을 고쳐 쓰는 게 고작인 어른 아이. 지금은 그렇다.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과거에 담긴 의미를 돌이켜본다. 한쪽에서는 붉게 보이는 것이 다른 쪽에서는 묽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