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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

by 이시랑

문득 아침에 현관을 나설 때 폐로 밀려오는 찬공기를 느꼈다. 큼지막한 냉기가 몸에 닿자 소름이 돋았다. 겹겹이 옷을 껴입었음에도 추위는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발걸음을 하나씩 내딛을 때마다 녹아내리길 바랐지만, 그다지 소용없었다. 급격하게 바뀌어버린 계절의 변화 앞에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말았다. 겨울이라니. 올 한 해가 벌써 끝이 나고 있다니. 이렇게 끝나버린다니…….

계절을 건너다 보니 벌써 겨울 앞에 서있는 나를 발견했다. 23년의 끝자락을 붙잡고 무슨 말을 해야할까. 평생 생각도 못한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것? 의지 박약으로 미루고 미루다 결국 해낸 하프마라톤? 내 작은 우물에서 우주를 품어낸 것? 이렇게 하나 둘 한 것들을 열거하다보니 무언가를 쉼없이 달린 듯 보였다. 그럼에도 속이 빈듯한 공허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늘 보여주기식에 머무른 내 불안은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중심은 없고 불안의 증식만 있을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쫓던 나는 방향을 잃었고, 줄 끊긴 오리배처럼 둥둥 떠다녔다.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생각을 멈추고 헤드셋을 끼고 빈지노의 노비츠키 앨범을 순서대로 재생했다. 늘 그렇듯 듣고 싶은 노래부터 찾아서. ‘Like a fool’의 익숙한 비트가 귓가에 다가왔다.


요즘의 마음가짐은 바보같이 하는 것이다.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르니까. 무언가를 읽고 적고 말한다. 보기만 하거나 떨기만 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노래를 몇 곡 듣다보면 내 우주가 열린다. 우주의 전화였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목소리를 나누기 시작했다. 웃음이 절로나더니 얼굴은 금세 미소로 흠뻑 젖었다. 시덥잖은 얘기어도 상관없다. 그 순간은 나를 녹이고만다. 화롯불앞에 마시멜로처럼 내 속은 말캉하고 달달하게 끈적였다. 우둔한 내가 머리보다 몸으로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전화를 마치고 바보 같던 나의 모습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단순한 행위가 커다란 안정감을 안겨주는구나. 22년의 나는 그저 마감을 지키기 위해 새벽마다 일정한 양의 글을 뽑아냈는데 올해는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려 인위적인 글을 찍어냈다. 볼때마다 마음에 들지도 않는 글은 다시보고 싶지 않았고 그 결과 제대로 된 작품(내지는 완성된 글) 하나 만들지 못했다. 마침표가 없는 나의 글은 미아가 되었고 나는 애써 모른척 실종된 ‘이시랑’을 방치했다.


나는 우주를 떠올렸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고민했다. 지금 난 어떻게 해야할까? 충분히 반짝일 것. 충만히 사랑할 것. 그리고 후회없이 표현하고 움직일 것. 놓쳐버린 것을 그리워하지 말고 잡고있는 것을 놓지말고 부둥켜 안아줄 것.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자들의 말보다 가치있는 건 붙잡고 고민한 자들이 남긴 진하게 그을린 흔적이라고 믿으니까. 나는 유달리 똑똑하진 않지만, 늘 변화하려고 애쓰니까. 눈은 미래에 가있어도 발은 현재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며. 우리의 답이 미래에 있다고들 하지만, 정작 현재를 돌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계절을 대하는 태도는 시간이 쌓일 수록 변할테지만 지금은 바보같이 사랑하기를.


23년 11월 18일 PM 22:22을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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