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유진, 유진…
나는 자꾸만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붉은 조명 아래 빛으로 머리를 감는 그녀를 떠올렸다. 술잔에는 투명한 청춘이 일렁이고, 웃음을 쉽게 자아낸다. 주변의 공기는 온통 알코올로 울렁거렸다. 나와 전혀 상관없이 살고 있는 사람을 상상했다. 다정을 가장 먼저 일러준 이었기에 이름을 지울 수 없었다. 오히려 부정이란 개념은 없다던데, 아니라고 할수록 머릿속에 깊게 새겨진다던데… 어디선가 들을 법한 얘기였다.
나는 꿈에서 밀려나자마자 땀으로 젖은 이불과 마주했다. 불쾌함을 덮고 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끈적이고 찝찝했다. 나보다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유진. 그 시절 내 우상이자 로망 자체였던 유진. 유진에 대해선 쓸 것이 많지만, 정작 담으려니 무엇을 그릴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유진이라는 인물 자체를 사실 떠올리지 않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래, 가장 먼저 공간을 떠올리자. 엉키고 설킨 공간 중에서 떠오른 건 윤슬이었다. 한 글자인 것들은 언제나 그 자체로 힘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 테면 물이나 빛 그리고 신 같은 것들. 물과 빛이 만나면 윤슬이 반짝였다. 유진이 그리는 것들은 늘 이런 식이었다. 가지고 있는 물감을 덕지덕지 바르며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나는 그런 장면을 멍하니 지켜보았고, 빛과 물 사이에서 뛰어노는 그림에 강한 이끌림을 느꼈다. 그런데도 무언가 쓸쓸해 보였다.
유진의 왼손에 묻은 물감처럼 당연하게 배어버린 담배 냄새가 다음으로 생각났다. 술자리에서 유진이 사라졌다면 당연히 담배를 태우러 간 것이다. 계단에서 내려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 붉은 반딧불이 끔뻑거렸다. 희끄멀건한 냄새가 향수처럼 흘러 타고 내게로 다가올 때 나는 향기라고 착각이 들었다.
나는 가진 게 없었다. 희미한 사람에 가까웠다. 외모는 못났으며 특별히 공부나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집안 또한 형편없었다. 언제나 비교와 피해의식에 찌들어 있기에 아닌 척 숨기는 일이 태반이었다. 실은 사랑을 바라지만, 내 형편엔 꿈도 꾸지 못할 일이기에 늘 거짓말을 달고 살았다. 아무에게나 빈말을 던지고 거진 농담으로 스스로의 허기를 채우며 정작 혼자가 된 순간엔 고독과 뛰어놀았으니까.
“너는 특별해. 그리고 좋은 사람이야.”
유진은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우리 말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나를 껴안아 주었다. 우리의 심장 박동은 같은 심박수로 일정하게 나눴다.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수천 번이라도 나는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기분은 따스히 녹아내려 어딘가에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사실 다정함을 바랐다. 나를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기를 바라왔다. 누구나 사실 그렇지 않은가. 알면서도 아닌 척, 모른 척. 삶의 우선순위는 사랑보다는 다른 것인 뜻인 양 굴어왔던 나를 벗겨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모른 채로 살았으면 나았을 것을.
유진은 상처를 만질 땐 너무 다정하게 약을 발라주었다. 그녀가 울면 나 역시 울었고, 웃으면 나 또한 웃었다. 유진은 내게 아버지가 없다고 했다. 그녀의 고백에 나돈데라고, 답했다. 서로의 결핍을 밝히는 순간 우리 사이는 환해졌다. 순식간에 젖어드는 감정이 마치 쥐어짜면 흥건히 흘러내릴 것 같았다. 밤이었다. 새벽까지는 아니었다. 바깥에선 비가 내렸고, 잠시 정전이 되었다. 방안에서는 남녀가 눈을 마주하다 시선을 놓쳤다.
“있잖아,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왜 좋아하는 거야?”
유진의 손을 잡고 있으면 불안에 떨려 이런 말을 꺼내곤 했다. 유진은 항상 무심하게 너라서 좋다고 했다. 이유를 덧붙이기보다는 이름을 붙여서 말해주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 좋아서 더 묻지를 않았다. 나를 사랑한다는 게 조건이 아니라 존재라는 게 이리도 낭만적일까.
‘다정 결핍’
나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 두 단어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다. 첫 번째 책에서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담고 잠시 글을 닫고 싶다. 속에 얽매여 있는 것을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도 이유 모를 애착을 갖고 있으니까. 지금에 와서야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너무 우습구나. 유진, 너는 나를 신경도 쓰지 않을 테지.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어.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에게 내디딜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