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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걸음을 내딛는 마음으로

by 이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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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예보는 내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연신 떠들어댔다. 이제 곧 세상은 축축해지겠구나. 넘칠듯한 물결로 가득하겠구나. 오지도 않은 빗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비가 오면 기분이 아래로 떨어졌다. 기세는 멈출지 모르고 수직으로 달려 나갔다. 원인을 과거에서 파헤쳤지만, 나오는 건 깊은 샘물뿐이었다. 물은 넘쳐흐르고 기억은 현재를 덮친다. 흘러나온 물웅덩이를 밟는 상상을 했다. 양말은 샤부샤부처럼 물에 적셔질 것이다. 눅눅한 공기는 주변의 기분마저 잡아당길 것이다. 비가 내리면 피할 곳을 찾고 싶었다. 어쩐지 시랑의 말이 떠올랐다.


시랑은 언제나 내게 숨을 곳은 찾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벽을 직접 만드는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항상 마음을 감출 곳을 마련하라고 덧붙였다. "어느 조직에 가서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구석을 챙겨놔. 기댈 장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네가 서있을 힘이 존재하는 거야. 그러니 꼭 한 편의 모서리를 향해 시선을 놓지 마." 나는 시랑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다가도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면 까먹어버리고 말았다. 빗방울이 바람과 함께 사선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우산은 어느새 별 필요가 없어졌다. 단지 정면으로 맞서지 않게 가려줄 뿐이었다.


우산과 맞닿는 빗방울 소리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말소리처럼 들렸다. 욕을 하듯 아주 거칠게 내리쳤다. 투둑-투두두둑-.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우산을 접었다. 머리칼이 실시간으로 젖는 기분이 느껴졌다. 피부에 맞닿는 물방울이 나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면으로 비를 맞았다. 아주 시원했다. 안경 렌즈에 맺히는 물방울은 그때그때 모습을 바꾸어갔다.


시랑이었다면 우산을 움켜잡았을까? 아니면 안간힘을 써서 숨을 장소를 찾아 나섰을까?


문득 궁금했다. 그가 내게 알려준 것은 아프지 않게 살아가는 법이었다. 소량의 외로움만 견딜 수 있다면 충분히 비 따위는 맞지 않고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의 세대는 외로움을 이겨내는 데 있어서는 아주 특화된 것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노래도 언제나 들을 수 있고, 영상도 언제든 재생할 수 있고, 게임 세계에 몰입하면 깨어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의 콘텐츠는 가득하다고 신나게 떠들었다. 유튜브가 보여주는 알고리즘처럼 네가 원하는 것만 보고 듣고 먹을 수 있다고 설명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시랑의 말에 흠뻑 취하기 시작했다. 달콤한 것은 언제나 쉽고 빠르게 몸에 젖어든다. 쓰디쓴 것은 혀 위에 입장한 순간 퇴장하길 마련인데 말이다.


벚꽃이 지고 장마가 왔다는 것은 여름이 짙어져 간다는 뜻이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은 어느새 한 계단을 껑충 건너고 말았다. 미루어왔던 시랑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로 다짐했다. 그가 내게 살아가는 방법을 말해주었듯이 나 역시 이 글을 마주할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어찌 보면 시랑이 사랑으로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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