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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by 이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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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때 문장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는 습관이 있다. 말을 뱉은 순간, 자신감이 저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줄어들고 만다. 근 30년을 살아오면서 언제쯤이면 말을 잘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죽기 전까지 유창한 말로 상대를 휘어잡는 모습은 상상이 가질 않는다. 누군가 내게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냐고 물은 적 있다. 그런 말을 내게 던진다면 얼굴이 쉽게 붉어졌다. 그러니까 나는 있잖아. 말하고 싶은 게 뭐냐면. 말은 힘을 잃는다. 힘없는 말은 쉽게 조련할 수 있다. 너는 내 말 사이로 끼어들고 답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매끄럽게 얼음 위를 타는 피겨스케이팅 선수처럼 뱉는다. 다시 주눅이 든다.


차라리 혼자 속삭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편한 마음이 들면 하고 싶은 말을 쉽게 꺼낼 수 있게 만든다. 종이나 하얀 모니터는 내 유일한 친구다. 그들은 내게 재촉하는 법이 없다. 어물쩡 거리는 태도에도 느긋하게 기다려준다. 고즈넉한 시간을 같이 보내는 우리 사이엔 서두르는 법이 없다. 말은 생각을 앞서 나오기도 하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 뜸을 들이고 공백을 만든다. 그 다음 생각이 나는 것들이 단어로 나온다. 문장이 이어져 문단이 되는 마법. 글 한 편을 썼다는 뿌듯함. 원고가 모여 책이 되는 경험. 수려한 언변을 가지지 못한 대신 조용히 글을 쓰는 법을 배웠다.


말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글에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어쩌면 계속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그 칭찬이 좋아서 자는 순간까지 껴안고 말았다. 모처럼의 따스한 말은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언젠가 내가 좋아하던 사람은 나를 계륵 같다고 했다. 다정해서 곁에 두고 싶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까이 다가오게 하고 싶진 않은 사람이라고 했다. 모진 말에도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때만큼은 말을 왕창 꺼내어 난도질당한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왜 나는 같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너의 손바닥에 갇히고 마는 사람이야? 내 쓸모는 고작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거야? 따지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이런 말마저도 썼다 지웠다 했을 뿐이었다.


나는 때때로 써놓은 글을 낭독한다. 낡은 기억이 묻어난 글을 후후 불어 털어낸 뒤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일정한 톤으로 묵혀 놓은 감정을 쏟아냈다. 북받쳐 오르는 것은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래도 이어가야 한다. 부끄러움이 밀려와 잠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 이대로라면 아주 멀리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랑을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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