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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청강

by 이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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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아빠는 과거를 말할 때면 목소리를 높이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곁엔 언제나 담배 냄새가 근처를 맴돌았다. 그러다 알코올이 목을 타고 흘러 들어가면 불콰해진 얼굴이 되었다. 자신의 과거로 초대하는 일종의 신호였다. 말을 듣기도 전에 지겨웠다. 입술을 쭉 내밀고 턱을 괴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시동이 걸린 차는 악셀을 밟은 순간 이미 달리고 말았다. 자신이 명문대에 갈 수 있었는데 대학 등록금이 모자라 4년 장학생으로 중앙대학교에 갔다는 것. 생활비가 모자라 군장학생까지 신청해 집안 살림에 보탠 것. 누군가에 밑에 있고 싶지 않아 사업을 벌였으며 승승장구했다는 말까지. 레퍼토리는 질리지도 않고 늘 똑같다.


“그러면 지금은 왜 이래?”

목에 걸린 말은 다행히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만일 그 말을 꺼냈다면 새아빠는 화를 참지 못했을 것이다. 있는 힘껏 목청을 높였을 테지. 새아빠는 현재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 과거에 화려함을 펼쳐 놓는 듯싶었다. 보이지 않는 과거는 얼마나 부풀려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니까. 거짓말은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지만, 추궁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가 그 꼬리를 밟는 순간 피곤한 일이 연달아 일어날 테니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디서 그런 말버릇이냐며 따지거나, 네가 아는 게 무엇이 있냐며 혼을 낼 것이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로선 딱히 대들 근거가 부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아빠는 문자 한 통만 남겨 놓고 도망쳤다. 문자의 내용엔 나에 대한 실망감과 앞으로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다고 쓰여 있었다. 엄마는 주저앉아 울고불고하며 새아빠에 대한 욕설을 뱉었다. 나는 그 해 1학기에 대책 없이 F를 받을 뻔 했다. 국가장학금도 못 받으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새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도대체 뭐하는 새끼냐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에 대한 실망감. 내가 앞으로 보일 모습은 이보다 못하면 못 했지, 낫지는 않을 거라는 나를 단정하는 태도. 부정적인 감정을 졸이고 졸여 욕을 한 바가지 끓였다. 그러나 다디단 맛이 아닌 쓰디쓴 감각만 남아있었다. 정신머리를 붙들고 살아가자. 엄마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남은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그 후로 나는 되는대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돈이 필요하니 아르바이트했고, 국가장학금이라도 지원받으려면 적당히 공부하며 살아갔다. 삶의 장기적인 목표나 꿈 따위는 없었다. 닥치는 대로 현재만 살아갈 뿐이었다. 말로는 앞으로의 성공을 쟁취해 나갔다. 저는 언젠가 성공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삶을 변화시키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유튜브를 보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나는 성실한 게으름뱅이였다. 그래도 계절은 무턱대고 흘러갔고 삶은 잘만 지나갔다.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콩이가 세상을 떠난 날 누군가에게 머리를 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새아빠가 떠나던 날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감각이었다. 나는 무언가 나를 떠나거나 잃어야 깨닫는 성격인 것일까.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실패를 청강하고 있던 것을. 과녁 없는 화살처럼 아무 데나 쏘고 말았다는 사실을. 그런 화살은 목적 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잃어버리고 만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되찾는다고 한들 이전과 같을 순 없을 테지. 하지만 남은 자는 써야 한다. 그게 나의 역할이다. 실패를 몰래 엿듣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나는 이제 이 수업을 종강하고 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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