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있는 수첩

by 이순직

아직도 병역 수첩이 있다. 안방 책장 귀퉁이에.


한국에서 병역은 예민하고 민감한 부분이다. 병역 면탈(免脫)은 사회적 논쟁거리로 쉽게 확산한다. 강풍 속의 산불처럼.


조선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양반 가문의 병역 면탈을 당연시하였고, 평민이나 노비가 덤터기를 뒤집어썼다. 주자(朱熹)가 집대성하고 체계화했다는 성리학의 영향도 없지 않으리라. 퇴계와 허준도 역시. 구암은 특례병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이익은 이해할 수 없다. 그만큼 엉터리 대충대충이다. 실록은? 자기 검증이 없던 시대니 누굴 탓하랴!


연극 연습을 하던 83년 여름에 징병검사를 받으러 영덕 체육관으로 가기 전에 동료들에게


“걱정마라. 나처럼 아담한 사이즈가 설마 현역이겠어? 방위겠지.”


큰소리 뻥뻥 쳤다. 그러나 체격 등위가 일을종(壹乙種), 징집 등급이 이급(貳級)이었다. 공연하는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고 2학기 강의는 애당초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종강 후 ‘압록역을 지나며’에서처럼 구례 여행을 했다.


84년 3월 28일 입영했다. 논산이다. 나중에 학위과정을 밟으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안경 쓴 얼굴을 만난 것도 논산 훈련소 내무반에서였다. 안경은 주로 인문학 출판을 목적으로 하는 작은 출판사를 만들어 교수들에게 원고 청탁을 위해 곧잘 방문해 학교를 떠나기 전까지 줄기차게 만나곤 했다.


훈련소에서 장정이라 불리며 생활하다가 84년 5월 5일, 의정부 101 보충대로 전속되었고 5월 11일, 제6포병여단 336 포병관측대대 본부 포대의 측지 소대로 배속되었다. 백의리. 주특기 144. 봄과 가을에 경기 북부 일대의 산들을, 길도 없어 정글도를 휘두르면서 산길 만들며 측지 장비 어깨에 짊어지고 올라가 산 정상에 포인트를 심었다.


여름과 겨울에는 부대 잡일을 측지 소대가 도맡았는데 특히 나는 비공식 주특기도 맡아야 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대장 딱까리(관사병‧생활비서)도 몇 달 했고 이발병에, 병기계(兵器係)도 했다. 사격 실력은 형편없지만 M60이나 권총을 비롯한 병기고(兵器庫)와 화약고(火藥庫), 오분 대기조 실탄도 관리했다. 토요일 아침은 언제나 라면이었다. 줄지어 식당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신났다.


강화도로 측지 작업 나갔을 때다. 측지 소대 두목이 중사였으니 그 무렵 20대 후반이거나 30대 초였을 것이다. 60 트럭(K511)이 이동수단이었다. 행락철이라 마니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얼추 목표한 측지 작업양을 채운 터라 마니산에 올라가기로 했다. 지금도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 한창 젊은 날에는 오죽했겠는가. 소주가 만땅이 되어서 나 홀로 60 트럭 바닥에 널브러져 정신 차리지 못했다. 마니산에 올라가기는커녕 60 트럭 바닥을 날이 저물도록 뒹굴었다. 물론 이 사건으로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두목도 공범이고 소대원들 모두.


학력고사 보러 갈 때도 방문 앞에서 작별했듯이 논산으로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부부에게 아들이 셋이나 있으니 굳이 각별할 필요가 없었다. 부부의 면회는 군생활 동안 딱 한 번 있었다. 의정부 교도소 뒤편에 주둔한 부대에 측지 작업을 위해 파견 나왔을 때. 일등병이었다. 5월 11일에 부대 배속을 받았으니 두 달쯤 지난 7월 말이나 8월 초였을 것이다. 둘째 말에 따르면 당시 군기가 빠짝 들어 얼간이 같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조정당하는 마리오네뜨(marionnette) 꼴이다. 중국 공산당의 6.25에 대한 인식을 막무가내 추종하는 14억 명가량의 중국인도 얼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느닷없이. 이쯤 되면 가히 공산당을 세계 3 종교에 덧붙여 4대 종교라 해도 손색없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죽음 앞에서도 자문하지 못하는 꼴이니 그들에게 삶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그런 마리오네뜨에게 영혼은 있는 걸까.


인사계가 부대 잡일을 도맡아 부려 먹어서인지 일곱 명 동기 중에서 가장 먼저 병장 계급장을 달았다. 기껏 한 달 앞서지만 85년 10월 11일이었다. 취침 점호 후 화장실 뒤로 집합시키는 바로 윗 동기들에게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것은 나였다. 병장이기도 했지만 윗 동기들은 본부 포대(행정‧차량‧측지) 통틀어 4명뿐이라 동기 머릿수로 밀어붙였다. 점호 후 화장실 뒤 집합에서 벌어지는 구타가 일과였는데 더는 당하면서 군생활하고 싶지 않았다.


학부 시절 성남 문무대와 전방부대 체험으로 3개월 단축을 받아 86년 7월 10일 전역했다. 당시 이제하(李祭夏)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전역 대기 일주일가량 그의 소설집 '초식(草食)'으로 보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복학하는 다음 해 봄까지 '시인 박광호'의 무대가 되었던 공장에 다녔다. 등록금이 문제였다. LPG 조정기와 호스를 만드는 공장인데 나는 포장반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조립부에서 일했다.


월급날이면 생맥주 한 잔이 전부였다. 지금도 간혹 신창시장에 가려면 공장터를 지나치는데 중국과 수교 후 공장은 폐업했고 을씨년스러운 건물만 스스로 낡아가면서 몇십 년째 터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파트가 들어섰다. 기억 위에 기억을 덧씌우는 걸까.


91년 봄부터 다시 학교로 돌아간 95년 봄까지 무엇을 했던가. 취직하지 않고 늘어지게 놀았던 걸까. 자정 훌쩍 지나 칠흑보다 깊은 한강을 강남에서 강북으로 영동대교 건들건들 걸어 거의 건너갈 즈음 초소에서 병사가 뛰어나와 발길을 잡았다. 자정 지난 시간에 혼자 한강 다리 건너는 모습이 수상했던 걸까.


“주민번호 대세요.”

“일삼사칠오공칠구.”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툭 튀어나왔다. 그림자보다 질긴 군 생활 기억. 백의리 민통선 안. 가을마다 유격훈련. 완전군장 구보와 각종 행군. 고통스러운 PRI와 M16 사격. 끝내 오지 않았던 동아리 여학우들의 면회.


언제쯤 병역 수첩은 자연스럽게 내 곁을 떠날까. 분단의 끝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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