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산, 십 년

by 이순직

밤이 깊다.


초안산 자락에 낮게 엎드려 달콤한 햇살에 기대어 낮잠 즐기던 나비가 어슬렁거린다. 녀석의 동네 순찰은 은밀하다. 온몸에 담뿍 익은 햇볕 머금고 축축한 어둠 사이를 건너간다. 꼬마를 맞닥뜨리면 가볍고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보란 듯이 느릿느릿 관목숲 속으로 사라진다. 꼬마는 대자연의 질서를 배우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표정이다.


모르지만 이미 아는 삶의 지혜들이 느닷없이 보석처럼 빛날 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은 마음 안 어딘가에서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다가 예고 없이 나타나 자신을 깜짝 놀라게 하고 찰나에 사라진다. 어쩌면 삶의 대반전이 숨어 있는 그런 순간들은 끔찍할 정도로 우리를 외면한다. 그러나 누구나 한 움큼 정도는 마음 저 밑바닥에 간직하는 작고 소중한 순간들이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예정에 없이 신혼집 있던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첫째가 빗님이 들어오고 싶어서 차창 두드린다고 할 때, 인수봉 너머로 노을 짙게 피어나는 걸 문득 볼 때, 다섯 시간 넘게 고속도로 달려 고향 골목길에 도착했을 때…, 마음도 알 듯 모를 듯 희미한 경련이 발바닥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번져간다. 살아온 시간을 단숨에 건너뛰어 그때들의 첫 모습을 만난다. 존재한다는 의식 저 밑에서 무언가 꿈틀댄다. 그것은 내 속에 있지만 내 것만은 아닌, 오랜 옛날부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 내려오는, 집단무의식이 자신을 꿰뚫어 보는 서늘한 떨림이다.


나비를 바라보는 꼬마의 짧은 놀라움도 다르지 않다. 대자연의 질서에서 자신을 관통하는 시선을 느끼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다. 목적 없이 떠난 여행지에서 만나는 바닷가 절벽에 부딪히는 거친 파도나, 방심한 채 길을 걷다 아주 잊어버린 옛 친구 얼굴을 만날 때, 자신 안에 두껍게 쌓인 시간의 나이테를 외면할 수 없듯이. 그래서 저마다 조용히 앉아 마음의 방을 정리한다. 정리하면 할수록 삶은 자신에게서 더 멀리 물러나 앉는다. 삶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욕망을 벗으면 좀 나으리라 추측하지만 실은 착각에 불과하다.


초안산 나비와 꼬마와 깊은 밤 속에서 십 년을 보냈다. 초안산 기슭에 잔디 구장 구민운동장이 들어서고 낮보다 밝은 조명등 아래로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 쏟아져 나와 걷고 달리는 사이, 어디에도 나비는 보이지 않는다. 꼬마 역시 훌쩍 자라 학교에서 배운 것만 아는 눈빛이다.


그 십 년 위에, 보란 듯이 걸터앉은 하루, 위에 또 하루가 앉는다. 한없이 느리다고 생각하던 녀석에게 뒤통수 맞으면 누구나 허둥댄다. 짐짓 나이를 잊으려고 하거나 무시하려는 노력도 소용없다. 묵묵히 자신 안에 쌓여있는 시간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래서일까, 밤들 속을 거닐면서 풀어놓을 이야기가 몸속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이전 13화당신도 있는 수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