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기억하는 가을날이 있지 않을까.
기억의 내용이 삶을 통째로 바꾸는 사건이거나 짝사랑으로 긴 밤 꼬박 지새우고 맞는 새벽이거나 혹은 겨울맞이 준비 중에 가졌을 고통이거나 저마다 다르겠지만.
가을에 갖는 자신 속으로 시간여행은 마음 차분히 가라앉히고 강바닥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서 높은 하늘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대자연에 감탄하면서 순응하는 일이 아닐까.
낯선 곳에서 눈 떴을 때처럼 당혹스러움에 빠지기도 하고 오래 만난 애인과 눈 맞출 때처럼 따뜻함이 마음 적시기도 하며 때로는 손톱 밑에 가시 박혀 밀물처럼 아픔이 온몸 구석구석에 밀려들지 않을까.
나는 가끔 아주 낯선 도시 골목길 걷고 싶어 안달 나곤 한다. 여기 떠나 저기 있고 싶은 욕구. 저기 벗어나 거기 있고 싶은 욕망. 사람을 가늠하는 조건들이 거추장스럽고 맺고 있는 관계가 수상하다 싶을 때면 영락없이 마음은 가을걷이 끝난 들판처럼 텅 비고 기운 빠져 시간 바깥에 서 있는 듯했다. 의미를 쫓다가 그것이 숨 쉬지 않는 육체와 어떤 관계도 더는 맺을 수 없을 때 갖는 덧없음이랄까. 하지만 가을은 덧없음 너머 언제나 우리를 지나간다.
가을이 지나간다. 입안에서 낮게 읊조리면 눈길은 저절로 창밖으로 달려간다. 눈에 익은 거리와 건물들이며 나무들이며 사람들이 낯설게 보인다. 내가 여기 있구나. 고통스러웠거나 아름다웠거나 살아온 시간들이 하얗게 지워지면서 저마다 처음 눈 떠 주위 둘러보는 갓난이가 된다. 길가에 지천으로 핀 코스모스를 외면할 수 없듯이. 마음 따뜻해지고 다시금 갖는 태어나 존재한다는 느낌들. 말을 배우지 않은 느낌들이 어떤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려 깊게 선택하고 결정한다고 믿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에 따른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가령 우리는 삶은 자신에게 맡겨져 있고 저마다 그 삶을 불행하게도 쓸쓸하게도 만들 수 있다고 믿어 행동하지만 실제로 그런 믿음이 제값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발등에 떨어진 실패나 열패감 때문에 절망하지만 대부분 핑계일 가능성이 큰 것도 우리의 판단이나 선택이 다분히 자의적이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인간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대자연의 순리에 따른다고 한다면 저마다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태풍 앞에서 의지나 신념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풍수지리와 점성술에서 엿볼 수 있듯이 대자연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발상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아무튼 우리는 예기치 않은 순간을 맞닥뜨리거나 피해 갈 수 있는 실수를 반복한다. 삶과 세계는 불확실성과 무의미로 가득 차 있다. 하여 우리는 어디에서 위로받을 수 있을까.
가을이 지나간다, 입안에서 중얼거리자 그것은 피톨처럼 온몸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모든 말이 주문에서 비롯하듯이 ‘가’에서 ‘을’로 넘어가면서 따뜻한 덩어리가 외롭고 쓸쓸한 마음 다독여주고 ‘지‧나‧간‧다’ 말할 때면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존재감을 준다. 비로소 가을이 내 안으로 들어와 대자연의 순리가 핏줄 속에서 꿈틀거린다.
거리를 내려다보면 저마다 페르소나(Persona)에 갇혀 허겁지겁 흘려보내는 시간이 보인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 사는데 사는 일에만 너무 골몰하는 건 아닐까. 두 걸음이나 세 걸음쯤. 사는 일에 열중하는 자신에게 떨어져 온몸으로 가을 맞는 순간들을 갖는 것은 어떨까. 사실 삶을 관통하는 많은 순간이 영감과 돈오, 계시를 담고 있지 않은가. 페르소나를 벗어 벌거숭이로 그런 순간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우리가 말하는 삶을 훌쩍 뛰어넘는 삶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여기 떠나 저기 있고 싶은 욕구. 저기 벗어나 거기 있고 싶은 욕망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런 욕구와 욕망을 실현할 수 없지만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 자체로 돌아가면 대자연처럼 어디에나 있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나도 당신도.
등 뒤로 가을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