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열 개

by 이순직

봄비


살아온 후미진 막다른 골목에도 그대가 내려와 잎 세운 개나리 그늘 가득합니다. 사는 일에도 쉬어갈 빈터 하나 있어야죠. 허리쯤 어깨쯤 나를 비우고 그대를 닮아 따라가 봅니다. 온 땅이 길이 됩니다.



감기에 취하다


유정인 용감하게 산다. 아빠 엄마에게 결혼도 선물하고 토요일 제집에 가서 일요일 밤에 온다. 맞벌이 부모 위해 미련 두지 않고 씩씩하게 이별한다. 노총각 큰아비는 덕분에 일찌감치 애보기 도사가 되었지만. 오늘은 한낮의 비원이며 사람 사는 풍경에 대해 수줍게 물음표 만들더니 다섯 살이 되면 피아노 배우겠다, 한다. 누군들 어린 핏줄 이쁘지 않으랴. 읽던 책 내팽개치고 뼈마디 오싹하도록 끌어안는다. 녀석의 감기가 옮겨온 후로 몸살까지 겹쳐도 이런 게 사는 것이라 미친 듯이 감기에 취한다.


소풍


봉우리 끝까지 오르다 지쳐 모인 물방울들이 아름답게 고여 있는 한계령 장수대, 인제 탄산 막걸리 한 병 웃음으로 들고 올챙이 담수어 소나무 고향길을 걷는다. 아우성치는 햇살들. 고였다 잠시 흐르는 시간. 가만 귀 기울이면 너 죽어 봤어?


담배 타는 여자


욕하지 마라. 일찍이 꽃가마 타고 동막골 들어설 때도 바짝 마른 잎담배 허리춤에 차고 있었거늘 어찌 너희들 세상만 있겠는가. 들에서 소리 없이 저 혼자 흔들리는 풀잎도 사는 세상이 있거늘. 후미진 뒷골목 어스름에 기대어 담배 타는 여자라고 손가락질하지 마라. 순결한 영혼이었다고 함부로 입 놀리지 마라. 누구나 가슴속 보름달 부럽잖은 세상 하나씩 품고 있으니 멋대로 걷는 발길에도 차이는 삶이라고 깔보지 마라. 아우라가 어찌 천사의 것이기만 하겠는가. 시간 타고 거슬러 올라가 이윽고 그곳. 시간마저 없는 先史의 터에서 벌거숭이로 뜨겁게 치솟는 태양을 맞이한. 핏속에 흐르는 루시를 어찌 잊으랴. 손가락 사이에서 벌겋게 불타는 담배를 타는 여자라 욕하지 마라.


고백(孤白)


어디로 가나. 삶이 끝나고 하루가 또 시작인데 바람은 살랑살랑. 세상은 오늘이어도 나는 어제이구나. 삶으로 만든 움집이라도 있을까. 두리번 두리번거려도 흐려지는 기억뿐이구나. 눈물 마른 슬픔도 고통뿐인 사랑도 내 것이 아니구나. 떠난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천사도 사천왕도 사는 이들의 것. 텅 빈 없음에 어디로 가나. 삶이 끝나고 나는 엊그제가 되는구나. 바람은 살랑살랑.


첫째야


너와 나. 흔들리고 부서지고 세상 모든 물들이 하늘로 올라가듯 다시 하나가 되는 개마고원 달리는 첫째야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어찌 나뭇잎뿐이랴 저 들에 흐드러진 풀잎도 우리와 같으니 너와 나. 거친 숨 내쉬며 흔들리고 부서지더라도 기억하렴. 흩어지는 모든 것들은 다시 하나가 되니 눈보라 몰아치는 만주 벌판 말 달리던 외로움이 밤하늘 별로 반짝이듯이 세상은 돌아가니 벼랑에 홀로 서는 날이 어둠보다 먼저 오더라도 너와 나. 기억하렴. 내 기억의 처음은 언제나 너라는 걸.


둘째야


하여 다시 아침이 오네. 너와 나 길 밖에서 길을 만들어 걷는 날들이 낙엽으로 나뒹굴며 아우성친다 해도 너와 나 저 들에 바람 맞서는 풀잎도 몸짓 아름다워 잊혀진 땅에도 봄날은 기어코 올 터이니 가는 길 그 끝에 서지 못한다 해도 발길은 마음보다 앞서니 둘째야. 너와 나 등 뒤로 저녁놀 벌겋게 타올라도 날은 아직 저물지 않았음을 기억하렴.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 너와 나 걷는 이 길이 끝나도 기억하렴. 내 기억의 끝은 언제나 너라는 걸.


사내


얼마나 꿈쩍하지 않았을까. 사내는 어둠 속에서 꺼낸 존재한다는 깊이를 눈빛에 담아 흐르는 강물과 뒤따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는데 검룡소 몇 방울이 숨소리 거친 골짜기 지나 황량한 벌판을 내달려 물길 이루기까지 어찌 눈물이 없었으랴. 중얼거리는 이마 위로 퍼붓는 두물머리 물빛들 조용조용 마음으로 삼키는 물들의 아우성. 욕망을 잠재우는 그러나 젊은 한때 뒷골목을 얼마나 서성거렸나. 들짐승처럼 굶주림 가득한 눈빛으로 원망할 그 무엇도 없이 자신을 탕진하지 않았나. 사내는 몸뚱아리에 달라붙은 지난 그림자를 가만히 본다. 슬퍼하지 않는다, 앞물의 자리를 뒷물이 순식간에 차지하듯 사는 거라고 떠날 때를 아는 물들이 모여 강이 되고 숱한 물길을 모아 강은 욕정으로 들끓는 도시를 관통할지니 거기 사내가 있다.


풀풀


가끔 뒤돌아볼 때 보이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산은 산으로 이어지고 물은 물에서 만나고 사람은 사람으로 사람이 되는데 마음 가야 할 길은 저 멀리까지 솟구치는데 풀풀 사람냄새 휘날리며 개마고원 벌거숭이 들은 들 솟대 하나 새워볼거나 바람에 맞서는 쉬 닿지 않은 참새미골까지 사람냄새 풀풀 휘날리는 솟대에 부끄럽지 않은 저녁을 위해 긴 인연들 이끌며 오늘도 풀풀.


나무


흔들리지 마라. 막다른 길에서 모진 바람 몰아쳐 잎사귀 마구 흔들려도 마음은 꿈쩍도 하지 마라. 애당초 길 바깥에 길이 있어 흔들리지 마라. 폭설 퍼붓는 긴 밤. 사람의 마을 고즈넉하게 잠들 때도 걸음은 멈추지 마라. 사는 일이 눈앞에 닥친 아픔을 견디거나 잊힘이 두려울지라도 흔들리지 마라. 이따금 뿌리 송두리째 흔드는 돌풍이 닥칠지라도 꿈쩍도 하지 마라. 당신의 마지막 시간 뒤에도 마음은 남을지니 춘천 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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