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장마가 잠시 그쳤다. 소강상태다. 더없이 두꺼운 구름장은 여전히 낮게 내려앉아도 빛은 어디선가 나타나 사위는 밝다. 아주 오래전 이백만 년 내내 비 내리던 때가 있었다니 이따위 장마야 껌값이다. 지구의 탄생과 변화를 거슬러 올라가 되새겨보면 사람이 만든, 대자연을 이해하려는 최고의 발명품인 시간이 새삼스레 무섭다.
물론 신 따위는 꼽사리도 끼지 못한다. 신의 나이보다 지구의 나이가 더 유구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생기기 전 지구에 이백만 년 내내 비가 내린다. 얼마나 웅장하고 쓸쓸한가. 상상해보라. 지구가 아무리 암석형 행성이라 할지라도 이백만 년의 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온통 온갖 것들이 물컹함으로 중무장했을 터이고 초대륙 판게아(Pangaea)마저도 위태로운 섬처럼 떠 있었을 터.
단백질이 우주에서 왔다는 설도 있지만 물컹한 바다뿐인 지구에 얼마나 많은 번개가 내리꽂혔겠는가. 최초의 단백질 합성을 위해. 이백만 년 내내. 북반구 남반구 적도 곳곳에서. 위대한 생명의 여정을 향한 단 한 번의 위대한 우연이 만들어지기까지. 쉴 사이 없이.
그리고 오늘 당신과 내가 있다. 집단무의식이 아무리 유전된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있기 이전이니 이백만 년 동안의 장마는 잃어버린 신화다. 애당초 쓸 수 없는 신화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아득한 옛날은 기껏해야 쥐라기 공원(Jurassic Park)까지다. 스티브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1993년도 작품. 아마도 상상력이 닿는 가장 먼 과거이고 그 이전은 꿈조차 꾸지 못한다.
그런데 이백만 년 동안의 장마는 이미 검증된 지구의 과거이다.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비가 내린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요란하다. 몸은 없고 의식만 있어도 쓸쓸하다. 어디에도 다른 의식은 없다. 완벽하게 철저하게 혼자다.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요란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익숙해질수록 안도감을 느낀다. 거친 바람은 당연하고 하늘이 보이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당연히 햇살은 없다. 이백만 년 내내.
의식은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풍경의 변화는 없어 저곳 이곳일지도 모른다. 의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다. 최초의 단백질이 합성되는 찰나의 장면을 어쩌면 운 좋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들 삶이 그렇듯 실패와 실수, 어긋남과 좌절과 절망의 순간들이 더 많다. 그럼에도 번개는, 전기 충격은 멈추지 않는다. 허공을 찢는 번개는 찰나에 대단히 강력하게 바닷속으로 수도 없이 내리꽂힌다. 비처럼 내리는 숱한 번개들 사이에 의식이 홀로 서 있다.
그리고 오늘 당신과 내가 있다. 나는 당신이 어떤 문화적‧경제적‧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어떤 경험으로 중무장한 사람인지 모른다. 대부분의 글꾼이 가지고 있는 막연하고 어렴풋하고 종잡을 수 없는 안갯속의 독자다. 당연히 나와 합이 맞는지 아니면 어긋나는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내가 죽은 뒤에 당신은 태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내 얘기는 아주 오래된 것이 되고 잊혀도 억울하지 않은 넋두리일 것이다. 이백만 년 동안의 장마도 마찬가지.
다만 분명한 것은 세상 모든 것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는 점. 흔적 찾기의 이름이 고고학이든 지구과학이든 과학수사든 상관없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점. 존재 이유와 존재 증명을 찾기 위해 마트에서 장보기 하듯 교회로 달려가면 손쉽다. 그러나 교회에서 만들어주는, 십일조로 일주일마다 쇼핑하는 존재 이유와 존재 증명은 대량 생산된 기성복이며 통조림이며 사람을 구분 불가능하게 하는 도긴개긴이다. 하긴 그것마저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면 달리 할 말 없다.
그리고 오늘 당신과 내가 있다. 인류 멸망 이후 최후 생존자처럼. 인식하지 않는 대상이나 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론에 바탕을 두면 모든 저승 사람에게 지구에 있는 것들은 이미 괴멸하고 멸망했으며 설령 이승 사람이라 해도 인식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이백만 년의 장마와 그 속에 있는 숱한 번갯불과 고막을 찢는 천둥이야 말해 무엇하리.
문제는 지금 여기서 당장 살아가는 자세가 다르다는 것. 형식과 내용을 대립 개념으로 이해하지만 실은 하나의 몸뚱이며 선과 악 역시 만나 화해해서는 안 되는, 격렬하게 영원한 다툼을 일삼는 적대 관계로 이해하나 선의 다른 이름이 악이며 악의 다른 이름이 선이라는 사실. 악당 없는 영웅이 있을 수 없다는 영화판의 확실한 흥행 보증 수표처럼 삶은 살아지지 않는다.
영화는 삶을 분할하고 구분하며 질서를 부여하지만 실은 뒤죽박죽 삶을 위로하는 작은 속임수라는 것. 열광할 일이 아니다. 몸이 뜨거워지거든 냉수부터 한 모금 시원하게 마시고 삶을 바라볼 일이다. 쉽게 흥분해서는 안 되며 항상 침착해야 한다. 선동에 넘어가는 일은 정치판에서 흔하지만,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순간 오랏줄에 갇혀버리니. 애당초 정치꾼은 본능적으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기주의자이며 글꾼은 ‘네가 쓰지 않는 것을 써야만 하는’ 운명을 받아들인 이타주의자다.
그리고 오늘 당신과 내가 있다. 이백만 년의 장마가 지나가고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하고 또 거침없이 시간 지나 문명이 생겨나고 거기에 더한 숱한 세월을 흐르는 강물처럼 떠나보낸 뒤에 비로소 오늘 당신과 내가 있다. 우연처럼.
남도에 물난리가 났고 오늘은 전국적으로 비가 쏟아진다는 예보. 두꺼운 구름장이 낮게 비행하고 있다. 바다 위로 혹은 거대한 저수지 위로 번개 내리꽂힐 때 아득한 옛날처럼 지금은 알 수 없는 어떤 단백질이 생겨나지 않을까. 멈춰 있으면 이미 시간이 아니므로. 하여 먼 훗날 어떤 이는 오늘을 어떻게 상상할까.
그리고 오늘 당신과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