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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Sep 12. 2023

춘천행

“배가 없네.”


춘천 누님의 말이다. 욕실에서 훌러덩 벗고 샤워하면서 제일 먼저 눈이 가는 곳이 뱃살이다. 중년을 넘어선 복부 비만은 성인병을 키우기도 하지만 그보다 뱃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물증이기도 하다. 여성보다 남성이 몸에 대한 애착이나 집착을 잃어버리기 쉽고 더구나 중년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켜켜이 살아온 삶의 흔적이 뱃살에 고스란히 고여 있다고 위안 삼기도 하지만.


작년 여름. 창동교에서 신매대교까지 자전거 여행은 순조로웠다. 문제는 신매대교에서 누님 집까지 가는 길을 알지 못해 춘천 시내를 거의 훑다시피 해서 겨우겨우 도착한 아픈 기억이 있다. 해가 떨어지기 일보 직전에 가까스로 집에 도착해 땀으로 젖은 옷을 벗고 샤워할 때도 영락없이 눈길은 뱃살에 꽂혀, 힘겨운 자전거 여행이지만 내심 뿌듯했다. 샤워를 마치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앉아 시원한 물을 마시는데


“배가 없네?”


누님이 사뭇 놀랍다는 표정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누님 집에서 나오는데


“집까지 또 자전거로 가게? 남춘천역에서 전철 타고 가.”


“무슨 소리. 전철 타고 갈 거면 자전거 여행이 아니잖아? 집에 가서 전화할게.”


“재는 어릴 때부터 똥고집이 있었다니까, 쯧쯧.”


매형이 알려준 길을 따라 자전거를 달리니 금방 신매대교에 도착했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 길을 몰랐으니 거의 4시간을 춘천 시내를 훑다시피 한 어제가 억울했고 제아무리 포병 144 주특기라도 초행길을 지도 없이 도전하는 짓은 여러모로 무리라는 걸 다시금 인정했다. 물론 몸 고생을 각오하고 도전하면 불가능하지 않지만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가성비가 형편없는 것은 확실하다. 돌아오는 길은,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갔던 길과 다른 코스로 돌아왔다. 물론 서울 시내를 훑는 일 따위는 없었다.


춘천행을 제외하면 대부분 창동교에서 북쪽으로 달린다. 의정부를 지나고 양주 시청 옆을 지나 덕계역까지 가는 날은 겨우 몸 푸는 정도이고, 소요산까지 가야 마음 편해져 남은 하루를 빈둥빈둥 보내도 아깝지 않았다.


정확하지 않지만 육 년 정도 되지 않았을까. 그동안 자전거는 한 번 바꾸었다. 처음엔 스틸을 타고 다녔는데 너무 무거워 말 그대로 악으로 깡으로 소요산에 다녀왔다. 그 무렵엔 덕계역에서 잠시 쉬면서 소요산까지 가나 마나 고민했지만 알루미늄으로 바꾼 뒤로 자전거가 아까워 당연히 자전거 도로가 끝나는 소요산까지 곧장 내달렸다.


“춘천까지 자전거로? 미친 거 아니야?”


“인생 힘들게 사네. 뭐 좋은 게 있다고 춘천까지 자전걸 타고 가?”


“올 때도 자전거 타고 왔다고? 별종이야.”


당시 직장 동료들은 소일거리로 쉬는 날이면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겠지 라는 추측을 했는지 모르지만, 춘천까지 다녀왔다고 하자 하나같이 혀를 내두르면서 자신들과 사뭇 다른 부류의 인간으로 나를 분류해놓고 저희끼리 동질감을 확인하면서 연대 의식을 가졌는지 알 수 없으나 유튜브 숱한 동영상을 보면 딱히 내가 별종이라는 판단은 서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은 나잇살이 많을수록 넉넉하게 확장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항상 예외가 있다. 가령 살아오면서 만났던 많은 얼굴이 경험이라는 곳간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경우와 유형별로 분류해서 단순화시켜 기억하는 경우, 애당초 나와 너라는 이분법으로 기억하는 등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나잇살이 반드시 공감 능력을 좌우하지 않는다. 멋진 삶을 살았다고 하는 사람의 공감 능력이 항상 뛰어난 것도 아니다.


이쯤에서 나는 자문해본다.


“공감 능력, 내 안에 있나?”


살아온 상황들을 떠올려 따져보면 답은 ‘어느 정도’에서 ‘조금’으로 점차 기울어, 급기야 ‘이기적’이라는 마침표를 찍는다. 나이 먹을수록 공감 능력을 확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착화하고 단순화하는 삶을 살았다고 참회록을 쓰고 싶을 지경이다. 속칭 꼰대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만 중요하고 그것만이 전부라고 믿는, 하여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이들을 향해


“너희도 나잇살 먹으면 꼰대가 되니 어쩔 수 없어.”


라며 스스로 위로하고 방패 삼는 허튼짓을 하지 않았나. 하여 훈계하고 참견하고 멋대로 판단하지 않았나. 고해성사가 또 다른 고해성사를 마련하기 위한 행위이듯 참회의 심정 역시 그렇다면 이 글은 결코 참회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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