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판대요. 자기야 얼른 약국 가봐.”
그녀가 스마트폰을 보면서 나를 쏘아보았다. 얼마 전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매한 마스크가 바가지였다는 걸 알고 나서 마스크에 예민해져 있다. 하기야 요즘 시국에 예민하지 않은 내가 더 이상한 놈이긴 하지만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스리슬쩍 붙이려던 궁둥이를 일으켰다.
“길 건너 건물 3층에 있어.”
그녀는 주민번호 생년 뒷자리를 당연히 알고 있으니 어쩌면 월요일부터 벼르고 있었는지도. 멀지 않고 바람도 그다지 차지 않아 맨발에 슬리퍼 끌고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건널목 앞에 섰다. 사람들은 마스크 쓰고 신호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엄마와 딸 사이가 분명해 보였다.
“민증 가지고 왔어?”
“아니. 엄만?”
“가지고 와야 사지. 에그, 정신머리 어디에다 두고 다녀!”
“면허증 있잖아. 나는.”
예상처럼 모녀는 나보다 앞서 건물 3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들의 뒤를 따라 승강기를 버리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역시나 길게 줄지어 있는 사람들. 맨 뒤에 나도 섰다. 줄 선 사람들도 이십여 분 기다려 만난 마스크 파는 약사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입과 코를 감추었지만 나는 드러냈다. 집을 나설 때 마스크를 집어들 수 있지만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마스크를 챙기지 못한 것은 실수이거나 그녀의 빈틈이 분명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약국 앞에서 줄서기를 하는 풍경도 우스꽝스럽거니와 하나같이 마스크를 쓴 사람들도 수상해 토끼몰이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의문이었다.
“천오백 원. 맞지?”
“여기 있어.”
집으로 돌아온 나는, 첫째는 휴학 중이어서 집순이라 걱정 없지만 둘째는 신입생이라 개강이 늦추어져도 마스크가 필요하니 개선장군처럼 그녀에게 마스크 두 장과 거스름돈을 내밀었다. 임전불퇴(臨戰不退)의 장군 행세를 하려고 들지만 결국 그녀가 깔아놓은 장기판의 졸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아껴 쓰지 않으면 곧 바닥날 쟁여놓은 마스크를 셈하며 순간의 포만감일지라도 아내는 행복한 표정이고 나는 토끼몰이를 당하고 있다는 의구심에 떨떠름했다. ‘편집의 힘’을 이미 겪은 터라 의구심은 확신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예의 편집이 일개 대학 단위가 아니라 국가 단위인 대중 매체의 ‘편집의 힘’이라면, 게다가 일정 ‘수준의 힘’까지 더해져 설득력 있다면 만들어진 공포감을 전염병보다 가볍게 다룰 수 있을까.
“자기야. 저기 1층 화단에 꽃이 폈네. 무슨 꽃이지?”
그녀가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가 놀라움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사이 들어 부쩍 서툴고 어설프고 껄렁껄렁해진 추위가 여전히 동네 건달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지만, 화단은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개나리 같기도 하고 생강나무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봄은 오는가 보네….”
“그러게. 그 많은 메시아도 봄은 어쩌지 못하나 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딴생각하느라 말이 헛나왔네. 그러니까 우리처럼 메시아가 많은 동네가 없다는 외신을 읽어서. 너도나도 메시아라고 해대니 서양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잖아? 어랏? 이것 봐라? 호기심이 돋을 만하지 않겠어? 게다가 메시아를 수출까지 하니 흥미로울 수밖에. 재미있는 건 그 해석이 고단한 역사 때문이라는 거야. 보통 민족적 정서라면 한을 꼽잖아? 아리랑도 그렇고.”
“그래서?”
그녀는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낱낱이 파헤치겠다는 투로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은 오래된 일이지만 한때 말빨로 먹고 살던 시간강사였던지라 은근히 오기가 피어올랐다.
“물론 압축 성장 때문이라는 이유도 들긴 했지만 말이야.”
나는 말꼬리를 내리면서 은근슬쩍 그녀를 살폈다. 논리를 잔뜩 늘어놓는다고 해서 말을 많이 한다고 설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말의 길이를 서로 다르게 하면서 입술 앙다문 침묵을 적당히 섞고 그 사이에 추임새를 넣는 기술까지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때 진실이든 말장난이든 나중 문제고 설득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하며 한 박자 쉬었다.
“예수가 독립운동가였다는 가정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고 봐. 역사는 해석이니까.”
“당시에 로마의 식민지였으니까.”
“우리 경우로 빗대면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친일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어. 독립파와 친로마파로 민족이 나누어져 있으니 예수로선 바리새파를 설득해서 자기를 따르도록 할 필요성을 느꼈겠지. 물론 모든 바리새인이 친로마파인 건 아니야. 대부분 그렇다는 거지. 아마도 예수는 종교를 매개체로 해서 유대민족을 하나로 묶으면 로마로부터 독립하는데 수월하다고 판단했을 것 같아. 종교를 통한 비폭력운동. 그러니 스스로 메시아라고 동네방네 소문내면서 바리새파 지도자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했던 거지.”
“지금 전도하는 거야?”
그녀의 표정이 뜨악하게 굳어졌다.
“자기는 내가 무신론자라는 걸 몰라? 무신론도 엄연히 종교라는 걸 또 얘기해야 하나?”
나의 외숙씨가 번동 다세대 주택 신혼집을 답사할 때 책장에 성경이 꽂혀있는 걸 발견하고 내내 섭섭해했다는 얘기는 의정부 가능동 술상 앞에서 들었다. 불교 신자인 외숙씨가 개신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이유는 훨씬 나중에 알았지만. 암튼 다윈의 진화론을 뿌리로 하는 진화론적 무신론이야말로 세상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거대 종교라는 말을 잔뜩 늘어놓기도 했다.
“농담이야. 이십 년 넘게 같이 살았는데 또 속은 거야?”
“어쭈? 말 끊은 거야. 지금?”
“잔기술 들어간 거야.”
“당했네. 아무튼 기득권을 놓치기 싫었던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콧방귀를 뀐 거지. 로마의 침공으로 사두개파는 물론이고 에세네파, 젤롯파는 궤멸했으니까. 촌에서 놀던 놈이 도시에 와서 입바른 소리를 해대며 설치고 다니니까 곱게 보일 리 없잖아. 찍힌 거야. 눈 밖에 난 거지. 독립은커녕 사형수가 됐잖아? 우리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엄청나게 사형당했잖아? 그런데 우리 동네 메시아들은 독립이 목표가 아니라 돈이 목표인 거야. 다시 말해 천민자본주의를 품은 메시아라고나 할까? 차라리 병아리를 품은 어미 닭은 이쁘기나 하지. 여기서 아주 근본적인 질문 하나. 왜 종교는 사람이 살기 힘든 지역에서 발생했을까?”
“살기 힘든 지역에 사니까.”
“맞아. 질문 속에 항상 답이 있지. 지금은 살기 힘드나 나중은 살기 좋을 거라는 희망 고문. 수십만 년을 그런 희망 고문에 부대끼다 보면 나름 논리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지겠지? 어느 날 갑자기 호모 에렉투스가 나타난 게 아니란 거지. 루시에서 시작해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를 거쳐 현생인류에 닿고 끝없는 희망 고문을 당하면서 만들어낸 이야기. 그걸 체계화한 신념. 개신교지. 바로 진화론적 무신론의 관점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녀가 느닷없이 치고 들어오자 살짝 당황했다. 깔아놓은 밑밥과 상관없는 엉뚱한 결론을 내놓으면 입만 아픈 꼴이 되고 그럴듯한 결론을 만들어내자니 뇌에 과부하가 걸릴 판국이었다.
“개신교의 시간은 직선이야. 창세기가 있고 요한계시록이 끝이지. 반면 불교의 시간은 원형이야. 끝없는 영원 반복. 윤회설이지.”
결론을 만들어낼 시간이 필요했다. 얼렁뚱땅 내뱉고 나서 시간을 벌 요량이었다. 꼼수가 먹히는지 어쩌는지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녀는 늘 듣던 레퍼토리라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끝이 있으니까 휴거가 있고 영생이 있고 뭐 그딴 얘길 하려고? 영생을 얻기 위해선 전도를 해야 하고 십일조를 내야하고? 마스크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녀의 단호한 물음에 오늘은 실패할 거라는 막연한 예감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그녀를 속이고 수작 걸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 함께 살아왔다는 현실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자신마저 속는.
“리처드 도킨스가 대표적인 진화론적 무신론자야.”
“자꾸 딴 얘기 할래? 저녁 먹기 싫어?”
라면도 끓이지 못하게 하는 깔끔이 그녀가 주방을 내줄 수도 있다는 선언에 더럭 겁부터 집어먹을 수밖에. 비단 저녁뿐만 아니라 내일도 위태로울 수 있었다. 슬그머니 발코니로 피신해 자전거를 괜스레 여기저기 만졌다. 겨우내 발코니에서 장식품 역할을 하던 자전거는 타이어 바람 빠져 물컹물컹해져서 페달을 손으로 돌려보았다. 디스크 브레이크는 정상 작동. 기어 작동도 정상. 창동역에 가서 바람만 빵빵하게 넣으면 올해 자전거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여행은 항상 시작했던 장소로 돌아와야 비로소 여행이 아닐까? 돌아오지 못하면 실종이 아닌가. 젊어서는 원심력에 매력을 느끼지만 나이 들면 구심력을 따른다는 말. 늙은 아버지는 수시로 창동에서 탯줄 묻은 벌방 사갑리까지 쏘렌토를 몰고 다녀오신다. 감나무며 매실, 자두나무를 돌보는 일이 있긴 하지만 그보다 탯줄에 대한 원초적인 끌림 때문이 아닐까. 마음 따뜻해지고 넉넉해지는. 힘겨워 고단한 인생 잘 살았다는 고향의 위로를 받는. 하여 삶을 실종이 아닌 여행으로 확인하고 싶은 건 아닐까.
“요즘 시국에 기껏해야 마스크 사는 것 말고 할 게 없다는 자괴감? 물론 백신은 만들어지겠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러나 늘 그래왔던 것처럼 새로운 전염병이 또 들이닥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자연의 역습이 아닐까?”
“환경에 답이 있다? 거창하게?”
“사람은 자연에 속해야 하는데 거부하고 까부니까. 종교다 뭐다 하면서 촐랑대니까. 대자연은 눈꼴 시린 거지.”
“잘도 갖다 붙인다.”
그녀의 입가에 엷은 비웃음이 번져 뒷덜미가 서늘해지면서 망해간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하긴 항상 나무에 붙어있을 순 없지 않은가. 간혹 떨어진들 어떠랴! 자포자기로 나를 밀어 넣자 물컹물컹하고 역한 악취 풍기는 익숙한 실패의 느낌들이 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 어떤 것들은 몇 달이나 몇 년 뒤에 느닷없이 밀려들기도 하지만 살아오면서 실패의 느낌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히는지 알기에 잔뜩 긴장해 겁먹은 상태로 쭈뼛쭈뼛 거실로 들어섰다.
“자기는 말이야… 음…”
그녀의 눈빛이 장보기를 할 때처럼 예리해졌다. 생침 꿀꺽 삼켰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음이야.”
“빈 수레라는 말이군.”
“요란한데 골똘히 들어보면 딱히 새겨들을만한 건더기가 없어.”
그녀의 말에 뭐라 대꾸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어차피 삶은 실패의 끝없는 연속이라고 한들 막다른 골목이지 않은가. 느닷없이 갑자기 마스크를 사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치밀어올랐다. 토끼몰이를 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의구심 따위는 집어치우고 창동, 2020년 봄을 걸어가는 사람들 행렬에 끼어들고 싶었다. 기자 뒤에 숨어서 제멋대로 사실을 주무르는 우리 동네 편집자도 미덥지 못하고 계절병처럼 걸핏하면 출몰하는 우리 동네 메시아 역시 꼴불견인데 입 꽉 다물고 사람들 행렬에 끼어들 수나 있을까.
“자기야. 그렇다고 도전을 멈출 필요는 없어. 도전하는 사람은 언제나 멋지거든.”
시무룩한 표정을 읽은 그녀가 승자의 너그러움을 담아 천천히 말하자 사람 사는 풍경에 관심 없는 황소처럼 두 눈 껌벅거리며 나는, 갈림길에 멈춰선 발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