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는 일은 신기하다. 우리 주위에 그보다 더 경이롭고 엄청난 일이 있을까.
어제 다음 오늘 오고 여름 가면 가을 오듯 나이 먹는 일도 나는 바보같이 당연하다 여기며 살아왔다.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집, 옆집 아이를 거리에서 만났을 때 어느새 훌쩍 커 제법 여자 티가 나 남자친구도 있을 법하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내가 먹은 나이는 셈하지 않았다.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무릇 어렵지만, 나이를 발견하는 것이 더욱더 어려운 일은 아닐까.
목성 띠를 이루던 철광석 성분 운석 하나가 쉼 없이 날아와 지구 바다에 떨어져 아미노산을 만들었다는 학설은 최근에 접한 것이고 태양계가 광활한 우주를 공전한다는 사실은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단양 부부와 별마루 천문대에 가기 전에 알고 있었다.
최초의 아미노산이 지구 생명의 씨앗임을 부정하는 이는 별로 없다. 그 아미노산부터 나이를 계산하지 않고 검은 이브, 루시(Lucy)부터 시작해도 나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아니다. 루시부터 계산하는 것은 욕심이고 테를지(Terelj)를 남하해 이윽고 아리수에 도착한 최초의 한반도인을 시작으로 계산해도 나이는 몇만 살이다.
과장이나 허풍이라고 조롱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당신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유전자는 내가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몸속에 아버지가 살아온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당신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이, 딸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가?
리처드 슈렉만(Richard Schenkman)이 감독한 영화, ‘지구에서 온 남자(The man of earth)’의 주인공은 만 오천 년을 살아왔다. 하이랜더(Highlander)의 주인공도 만만치 않다. 이들의 나이는 영화 안에 갇혀 있다. 그러나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집단무의식을 기억한다면, 그다지 정교하지 않지만, 우리들 모두 몇만 살쯤은 가뿐하게 먹은 나이다. 집단무의식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몇만 살은 아무래도 너무하다고 물건값 흥정하듯 당신들이 뻥이 심하다는 눈빛을 보낸다면 몇백 살쯤으로 깎아줄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인간은 유전자 프로그램에 따라 성장하고 사랑하면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줄 의무가 있는 존재라고 한다. 과격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유전자 전달이다. 족보가 유전자 전달목록쯤 되지 않을까. 아무튼 리처드 도킨스의 얘기를 따라가면 좀 억울한 느낌이 든다. 나도 그렇고 당신들도 마찬가지지만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이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일들이 유전자 전달을 위해서라니! 어처구니없어 화를 내도 뾰족한 수가 없다. 당신과 당신의 유전자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으니.
이만큼 생각을 풀어놓으니 떠오르는 게 있다, 시간이다. 동서양의 시간관(時間觀)을 찾아보다가 주목한, 기독교와 불교로 양분할 수 있는 종교였다. 당신들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직선의 시간을 만나며 불교 윤회관(輪廻觀)에서 원형의 시간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나는 태어나고 이윽고 죽지만 내 몸의 유전자는 내 마음속 집단무의식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악착같이 피해 가려고 했던 노총각 때 아버지는 기어코 결혼시키려 했던가. 리처드 도킨스를 알 리 없는데 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옆집 아이를 만났던 그 거리에 태풍이 아열대성 저기압으로 바뀌면서 며칠째 비가 내린다. 물의 순환이다. 비는 아득한 날에도 내렸을 터인데 기억하지 못한다. 오직 사람만이 상상의 날개 아래에서 떠올릴 수 있다. 그러니 당신들은 당신들의 나이만 먹은 셈으로 세상을 볼 것인가. 아버지의 수많은 할아버지의 나이도 당신 몸속에 있다며 살아갈 것인가.
나 역시 얼마나 나이 먹었을까. 소녀에서 숙녀로 훌쩍 커버린 옆집 아이만큼 먹었을까, 아리수 최초로 발 담그던 한반도인부터 계산한 나이일까. 아니면 루시(Lucy)부터일까.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