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등산로 입구 통나무 의자에 앉아 능선을 올려다보았다. 빽빽하게 늘어선 나무들은 일제히 가지를 뻗어 한여름의 정오를 붙잡고 있었다. 산을 휘돌아가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팔랑거렸다. 하늘은 높고 햇살은 어제와 달리 사나워졌다. 지치지 않고 뛰어다니던 개마고원이 떠올랐다. 잎갈나무 숲은 개마고원 곳곳에 있었다. 햇살은 벌겋게 달구어졌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사랑이 끝나고 수애 옆에 쓰러지듯 눕자 하늘이 쏟아져 내려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수애의 젖가슴 위로 잎갈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온 햇살 몇 개가 반짝거렸다. 숨 쉬는 아랫배와 거뭇한 사타구니에도 햇살이 꿈틀거렸다. 수애의 알몸을 겉옷으로 덮었다.
“여기에서 살 순 없어. 가자.”
“죽으려고 환장했어? 강을 건넌다고 해도 붙잡혀. 브로커도 없잖아?”
“엊그제 어머니 전화를 받았어. 브로커가 집으로 찾아와서.”
“살아계셔?”
수애는 화들짝 놀라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초급중학교에 다닐 무렵 어머니와 수애의 엄마는 밀수꾼에게서 물건을 받아 장마당에서 함께 좌판을 했다. 한밤중 남몰래 밀수꾼의 창고로 물건을 받으러 갈 때 수애와 내가 도와주곤 했었다. 조금이라도 더 들고 가려고 그녀와 나는 늘 신경전을 펼쳤다.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데 목소리는 틀림없었어. 강 건너에서 기다린데.”
수애는 골똘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졌다.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던 엄마를 떠올리는 듯했다.
“모레 밤이야. 같이 가자. 너 없이 살 수 없어.”
“혼자 가. 난 싫어.”
“왜? 원호 놈이 치근덕거린다고 했잖아? 귀여웠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수애는 버럭 화를 냈다.
“아부지를 버려두고 어떻게 가? 또 동생은?”
“같이 가면 되잖아?”
“아부지를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해? 조국을 배신하는 놈들은 인간 취급해선 안 된다고 입에 달고 살잖아? 엄마가 경비대 총에 맞아 죽었을 때도 강을 건너려 했으니 당연하다고 얘기하는 아부지야. 머릿속에는 오로지 당에 대한 충성뿐이야. 그런 아부지를 버리면 얼마 못 가서 죽을 거야. 아쉬운 소리도 못 하는 성격이라 굶어 죽을 거야. 동생은 장마당 꽃제비가 될 거라고.”
“아버지를 설득해. 연변에 간다고 하면서.”
“아부지가 되놈들 싫어하는 거 알잖아? 천년 원수라고 하잖아? 장마당에 떠도는 소문도 알아. 여자를 돈 주고 사는 걸. 설득할 수 없어.”
수애의 목소리에서 어두운 체념이 묻어났다.
“모레 밤에 집으로 갈 테니까 어떻게든 돌려세워 봐.”
“혼자 가.”
“너 없이 살 수 없어.”
“나도 그래. 하지만 살아보려고. 아부지를 버릴 수 없으니까.”
수애는 눈물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꼬리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귓바퀴에 고였다. 그녀를 더 이상 다그칠 수 없었다. 똑바로 누워 팔베개하고 하늘을 보았다. 땅으로 쏟아지던 하늘이 잎갈나무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하늘이 너무 눈부셨다. 나는 윗몸을 비틀어 수애의 알몸 위로 올라갔다. 지난가을의 잎갈나무 낙엽이 섞인 흙냄새가 수애의 살냄새와 함께 코밑으로 몰려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날 보지도 못했어?”
눈앞에 민수가 서 있었다. 눈 뜨고 앞이 보이지 않았다. 몸에 고여 있는 기억을 떨쳐내려고 통나무 의자에서 일어났다. 처음 입어보는 등산복에 움직임이 어색했다. 붙잡지 못한 첫사랑은 뿌리 깊은 고통이었다. 목사님이나 어머니는 물론이고 민수와 희라에게도 보여줄 수 없고 마음에서 버려지지도 않았다. 개마고원 잎갈나무 아래의 서툴고 애틋한 순간들을 평생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등산복이 새것 같은데? 단단히 준비했네?”
“핑계 삼아 장만했어.”
“허우대가 좋으니까 잘 어울리네.”
민수가 비아냥거렸으나 맞대응으로 핀잔하지 않았다. 잔뜩 독 오른 녀석을 괜히 긁어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면 뒷감당이 만만치 않았다. 혹시라도 지나가는 등산객이 탈북자나 혜산이나 미사일 도발 따위의 단어들을 들으면 경멸 가득한 눈초리로 쳐다볼 게 뻔했다.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웃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지만 민수의 말처럼 전쟁 도발의 후예라는 눈빛으로 경멸하고 조롱하며 지옥에 떨어질 놈이라며 침 뱉는 이들이 더 많았다.
등산객 대부분이 중년 이상이라 위태로웠다. 혹시라도 술 취한 등산객을 만나면 시비에 휘말려 급박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저마다 감정의 밑바닥에 전쟁의 공포가 여전히 꿈틀거렸다.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면 지금껏 노력이 물거품이었다. 등산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행동하면서 희라에게 눈도장 받는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너도 옷 잘 입었네. 산에선 빨간 옷이 눈에 금방 띄니까.”
“어쩌다 보니 입고 있더라. 본능이야. 예전에 받던 유격 훈련에.”
“유격 훈련?”
“있어. 군에 가면. 험지 돌파라든가 근접 각개전투, 산악 행군 같은 거. 넌 군에 가지 않았겠네?”
민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당연히 다녀와야 할 군대에 가지 않은 약점을 잡았다고 확신하는 눈빛으로 빙그레 웃음까지 지었다. 고향에 있었다면 인민군에 입대해야 하지만 토대가 나빠 청년돌격대로 쫓겨났을 것이다. 일부러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으면서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희라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민수는 아쉬운 표정으로 눈길 돌려 등산로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을 훑었다.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 어디에서도 희라는 보이지 않았다. 연락 없이 오지 않을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도장을 받는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도 걱정이지만 혹시나 예기치 못한 사고가 갑자기 생겨 다치지나 않았을까, 하는 우려에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서울은 혜산보다 경쟁이 더욱 치열한 곳이라 걸핏하면 작은 사건에 휘말려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층간소음도 그중 하나였다.
“너 같은 종간나가 어떻게 수애와 사귀어? 말도 되지 않잖아?”
원호는 다혈질 성질을 못 이기고 다짜고짜 두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옆에 서 있는 명규도 팔짱을 끼고 덩달아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동상 청소를 끝내고 대부분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먼동이 트기 전, 어스름이 남아 있었다.
“사내새끼가 토대를 알아야지 망둥이처럼 날뛰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한 명이면 충분히 맞서 주먹다짐을 할 수 있지만 명규까지 달려들면 대책이 없었다. 맞은 만큼 때려주겠다는 각오로 싸우더라도 뒷감당이 어려웠다. 먼저 시비 걸고 때렸다고 하소연해도 누구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토대 때문이었다. 만일 원호나 명규가 한 대라도 맞아 멍이라도 생기면 다음 날 선생한테 한두 대 맞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뇌물을 바쳐야 눈감아 줄 텐데 할아버지뿐인 집구석에 돈 나올 구석은 없었다.
“만나지 마라. 경고다!”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원호를 보자 녀석은 기세등등하게 내뱉었다.
“잘 생겼다고 날뛰면 벌을 받아야지!”
명규도 자기 일처럼 거들었다. 몰매 맞더라도 수애를 포기할 수 없었다.
“싫다. 내가 왜 포기해야 하는데? 수애도 날 좋아하는데!”
맞서 주먹질하지 않고 당하는 쪽을 선택했다.
“종간나 새끼 봐라!”
원호가 허벅지를 향해 힘껏 발길질했다. 엄살이 살길이었다. 제자리에 꼬꾸라지면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기회다 싶은 원호와 명규가 발길질을 쏟아냈다. 배와 등, 옆구리에 닿는 아픔을 이겨내면 수애는 온전히 내 것이었다. 네놈이 나를 두고 수애를 차지할 수 없어. 이를 악물었다. 날이 완전히 밝자 거리에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오늘뿐인 줄 알지 마라. 같은 조로 청소하는 모래도 글피도 있어!”
원호가 마지막 말을 내지르고 도망갔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목소리가 조금씩 다가왔다.
“학생, 괜찮아? 나쁜 놈들이네.”
그제야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후다닥 도망가는 원호와 명규를 노려보았다. 모래도 글피도 얼마든지 맞아주마. 소리치고 싶었다. 동상은 저만치에 높게 서서 허수아비처럼 아무 말도 못 하는 멍청이였다.
“저기 온다. 같이 오는 사람은 누구냐?”
민수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걸어오는 움직임으로 보아 희라가 분명한데 옆에서 걷는 여자는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동네 친구일까? 눈도장 받을 기회가 줄어드는 걸 직감했다. 민수는 어떻게든 따돌릴 수 있는데 여자 둘이 찰싹 붙어서 등산하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항상 어긋나니까 계획을 세우나. 점점 가까이 오는 희라가 반가워 입술에 웃음이 번지지만 눈동자는 여자를 파악하기에 바빴다.
“인사해. 언니야.”
“처음 만나죠? 반가워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희라 언니예요.”
“잘 부탁합니다. 민숩니다.”
“방댑니다.”
언니를 향해 애써 반가운 표정을 지었으나 우이암까지 민수와 티격태격하며 올라가야 했다. 아니면 묵언수행 하듯 입 다물고 걷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망친 등산이라고 여기다가 언니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희라에게 눈도장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니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 괜찮은 청년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면 의미 있는 등산이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 까탈스럽지 않았다. 남자가 미인에게 본능적으로 호감을 느끼듯이 여자에게 잘생김은 언제나 먹혀들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우이암까지 두세 시간 걸립니다. 가시죠?”
민수가 재빠르게 언니에게 등산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언니와 희라가 앞서 걷고 민수와 나는 뒤따랐다. 백두산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 백두산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한 겨울에 올라갔다. 왜 그래야 하는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방학에 농한기라 일없이 빈둥거리는 학생들을 마냥 놀리기에 학교 당국은 눈꼴 시렸을 것이다. 허튼 생각을 애당초 하지 못하게 틀어막을 요량으로 쉴 사이 없이 뺑뺑이를 돌렸다. 넌 내 배낭도 들어. 원호가 말했다. 왜? 토대가 나쁘잖아? 원호는 배낭을 내 가슴팍으로 던졌다. 내 것보다 무거웠다. 분명 쌀이 들어 있었다. 녀석의 배낭까지 짊어지고 올라가는 백두산은 맑은 공기에도 고통스러웠다. 선생에게 말해도 친구 사이에 그럴 수 있다며 원호를 두둔했다.
“중턱까지 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여기에서 좀 쉬다 가지요?”
민수가 언니에게 말했다. 나는 올라가면서 백두산 생각에 빠졌는데 녀석은 언니의 상태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언니는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고 걸음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아차, 싶었다.
“그러시죠?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요.”
민수보다 늦었지만 동의했다. 운동기구가 있는 널찍한 공터였다. 오십 줄은 충분히 넘은 어르신들이 저마다 운동기구를 붙잡거나 올라타거나 앉아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몇몇 사람들은 정상에 오른 것처럼 산 아래를 향해 야호, 소리쳤다.
“그럴까요?”
언니는 밝게 웃었다. 가렵기 전에 긁어줘야 하는데 그런 쪽으로 젬병이라 속으로 자책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 다짐까지 했지만 타고난 천성이 모자라서인지, 보고 들은 것이 없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뒤늦은 후회는 쓸모없었다. 언니의 따뜻한 눈길은 이미 민수에게 가 있었다.
언니와 희라는 저만치 떨어져 앉아 얘기했다. 언니는 대화 중에 가끔 민수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매포에서 목사님과 어머니에게 희라를 보여주겠다는 계획에 퇴짜 놓더니 그녀가 언니에게 나를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작고 소소한 일상도 공유하는 자매 사이라 언니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생각에 난감했다. 좀 더 빠릿빠릿하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했다.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이번엔 나랑 갈까요?”
언니가 다가와 말했다. 희라가 민수와 짝을 지었다는 사실이 불쾌해도 언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평범한 보통 남자라는 사실을 머릿속에 단단히 심어줄 기회였다. 희라에 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언니의 눈 밖에 나면 손해라는 인식은 민수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다행히 결정적인 실수는 하지 않았다. 작은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잘 모시겠습니다.”
“무슨 그런 말까지 하세요? 편하게 가요.”
언니가 앞장서고 희라와 민수가 자연스럽게 뒤에서 따라왔다. 뒤통수가 궁금해 뒤돌아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언니에게 내가 희라를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인상을 주면 제 살 깎아 먹기였다. 언니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서울 생활은 힘들지 않아요?”
열댓 걸음 걷다가 언니가 물었다. 하나원을 나와 누구에게도 혜산 출신임을 밝히지 않았을 때 목사님과 어머니에게서 몇 번 들어본 질문이었다. 머리를 회전판보다 빠르게 돌렸다. 아주 작은 말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습니다. 서울은 살기 좋은 곳이잖아요? 매포는 좁아서 서너 사람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입니다. 편하기도 하지만 불편하기도 해요.”
“네?”
“시골은 다 그렇잖아요? 길에서 보면 서로 안부를 물어보는 경우가 많아요. 장점이지만 단점이죠.”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언니가 정색했다. 이런! 또 실수했구나. 낭패감에 입술이 바싹 탔다. 희라가 언니에게 탈북을 말하지 않았을 리 없건만 단순하게 생각했다. 한두 번은 실수지만 반복하면 단점이었다.
“외래어가 너무 힘듭니다. 아직도 어렵고요.”
“그래요? 말은 의사소통하는 도구인데 어렵다고 하니 생활하면서 불편하겠어요.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들어도 뜻을 나눌 수 없다는 거고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긴데 불편하겠어요?”
언니가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점보다 단점을 찾으러 굳이 동생을 따라왔구나. 언니 역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서울이든 혜산이든 똑같은 사람이라고 바락바락 핏대를 세울 수 없었다. 민수와 경쟁 중이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 강력한 내 편이 될 수 있는 언니와 말다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언니에게 잘생김은 첫인상의 반짝 효과뿐이었다. 사소한 단점은 내주더라도 큰 장점 하나를 머릿속에 단단히 심어줘야 했다. 인간적이며 다정다감하고 무엇보다 삶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말로 백날 떠들어봐야 참새 지저귐보다 못한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행동으로 보여줄 기회를 잡아야 했다.
“열심히 공부하는데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문화가 달라 말이 다른데 차차 알아가야지요. 하지만 토박이가 되는 건 어렵죠. 유년의 기억이 죽을 때까지 그림자로 붙어 있을 테니.”
“네?”
“이해하지 못해도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면 돼요.”
“섭섭합니다. 너무 무시하는 것 같네요. 하하.”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고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비굴하지도 약삭빠른 셈법에 빠져들지도 않는 우직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눈에 띄게 대놓고 언니에게 아부하는 짓도 거부감을 가질 것이다. 하는 듯 마는 듯 비위를 맞춰야 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얘기죠?”
속담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마침표를 찍어서 되물었다. 언니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언니의 입술이 잠시 삐죽거렸다.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다. 긴장했다.
“여든한 살이면 버릇이 끊어지고요.”
“네?”
“아닌가요?”
“죽을 때까지 간다는 속담이잖아요?”
이 여자가 날 놀려먹으려는 고약한 심보를 부리고 있나.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말장난을 하자는 것인지 나를 테스트 하는지 아리송했다. 섣부르게 어느 한쪽으로 판단해 대응할 수 없었다. 언니는 혜산에서 몸에 익은 습관이나 사고방식을 버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충분히 동의한다. 주장이나 견해가 아니라 탈북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살면서 변한다. 당장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그 일을 앞에 두고 어떻게 행동할지 자신조차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누구나 상황이나 환경이 변하면 그에 맞춰 행동한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혜산의 방식으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언니는 물고 늘어졌다. 답답했다.
“맞아요. 그래서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필요해요.”
“동의합니다.”
나는 말다툼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서둘러 막았다. 애당초 말과 행동은 갈등 관계여서 항상 일치시킬 수 없으니 맞장구쳐서 호감을 끌어냈다. 언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멈추고 걷기에 집중했다. 급경사였다. 걸음을 멈추고 슬쩍 뒤돌아보았다. 바로 뒤는 아니어도 곧잘 따라올 거라 짐작했는데 민수와 희라는 보이지 않았다. 낙오는 민수와 희라가 했는데 내가 낙오한 기분이었다. 등산을 포기하고 내려갔을 수 있고 원통사를 구경하거나 천천히 올라올 수도 있었다. 급경사를 올라가자 사람들이 쓰러진 통나무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었다.
“민수가 보이지 않네요.”
“어머, 정말이네요. 다른 길로 갔을까요?”
“늦을 수 있으니까 기다려보죠.”
등산로 가장자리 맨땅에 앉았다. 도봉산 중턱이었다. 도시가 발아래에 있는 풍경이 낯설었다. 백두산은 물론이고 보타산에 서너 번 올라갔을 때도 보지 못한 낯선 풍경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저렇게 작은 풍경 속에서 파랑갱이 빨갱이 서로 삿대질하며 헐레벌떡 살았구나. 내려가면 또 그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그런데 민수와 희라는 어디에 있을까. 올라오는 사람들을 찬찬히 살폈다. 산속에서 눈에 금방 띈다는 빨간 옷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희라에게서 나를 떨어뜨려 놓으려는 언니의 작전일지도 모른다는 짐작까지 했다. 불안했다.
“우이암에 있다네요. 어서 올라가요.”
언니가 일어나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우이암이라면 한참 위쪽이었다. 어떤 지름길로 갔기에 벌써 도착했을까. 언니를 앞질러 허겁지겁 올라가고 싶지만 걸음을 맞추었다. 언니는 희라를 바라보는 내 눈빛을 눈치챘을 터여서 조급하게 굴면 속 좁은 놈으로 비칠 수 있었다. 언니의 발걸음은 한없이 느렸다. 일부러 한 걸음 크게 내딛어도 언니는 흔들리지 않았다. 성급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키 높은 활엽수 사이를 걸어가자니 개마고원의 숲이 떠올랐다.
수애와 함께 누워있기 알맞은 외진 장소는 숲 안쪽 깊숙한 곳이었다. 누워 잎갈나무를 올려다보면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집까지 물통을 들어줘서 동생이 고맙대. 힘에 부칠 것 같아서 그랬어. 목구멍까지 올라온, 처남인데 당연하지를 삼키고 대꾸했다. 어머니에게서 전화 왔다거나 강을 건너자는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달째 망설이면서 수애를 버릴 수 없다는 결심에 닿았지만 설득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 여전히 제자리였다. 고민 있어? 얼굴이 안 좋아. 원호가 아직도 괴롭혀? 수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의 속살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희라가 발목을 겹질려서, 거의 다 올라와서, 어떡하지요?”
민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숨도 거칠게 몰아쉬었다. 희라는 바위에 걸터앉아 발목을 주물렀다. 언니는 황급히 다가가 희라의 얼굴색부터 살폈다.
“어때? 괜찮아?”
“좀 쉬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내려갈 수 있겠어?”
“마사지하면 좋아질 거야.”
“어쩌다가 이랬어?”
“다 올라왔다고 긴장이 풀어져서 발을 헛디뎠어.”
희라는 말과 달리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등산 중에 발목이 겹질리면 오도 가도 못해 차라리 무릎이 까지는 편이 나았다.
“십 분 동안 업고 올라오느라 진이 빠졌어요.”
민수가 언니에게 하소연했다. 칭찬을 듣고 싶은 표정이었다. 나는 겹질린 발목보다 민수의 등에 업혀서 희라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걱정했다. 듬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기를. 스킨십은 당연히 했을 것이고 민수의 귓가에 숨소리도 불어넣었을 터였다. 어쩌면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달콤한 대화도 했을지 몰랐다. 그런 분위기라면 서로 신뢰감을 나누었을 것이다. 입술이 바짝 탔다.
“좀 어때?”
희라에게 다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최대한 지으면서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지겠지. 아직도 상태가 안 좋아.”
희라는 조심스럽게 발목을 주물렀다. 통증이 올라오는지 얼굴을 찡그리면서 어금니를 질끈 씹었다. 발목이 겹질려도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이내 괜찮아지는데 이상했다. 발목이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피가 나거나 골절로 의심할 정도는 아니지만 부기가 오른다는 것은 확실히 나쁜 징조였다. 보문능선으로 가려는 계획은 접어야 했다. 내려갈 일이 걱정이었다. 발목이 정상으로 돌아오길 기다려야 했다. 등산을 통해 그녀와 마음의 거리를 좁혀보려는 수작은 시작도 하기 전에 날아가 버렸다. 마음 비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혜산의 민둥산과 달랐다. 눈길 닿는 모든 곳에 나무들이 힘껏 가지를 뻗치고 잎사귀들이 산바람에 팔랑거렸다. 폐 깊숙이 들어오는 나무 냄새 흙냄새가 눈을 맑게 했다.
“아앗!”
희라가 일어서려다 황급히 주저앉았다.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고 어금니를 질끈 악물었다. 발목은 조금 전보다 더 부풀어 올랐다. 단순히 겹질린 정도가 아니었다. 겹질렸다면 벌써 말짱해져야 하는데 점점 심해졌다.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내려가자. 업혀.”
민수는 부산스럽게 굴더니 희라 앞에 쭈그리고 앉아 등을 내주었다.
“아까도 얼마 못 가서 낑낑댔잖아? 어깨로 부축해 줘. 한 발로 내려가야지.”
희라는 여전히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한 발로 어떻게 내려가냐? 이 기집애야.”
언니가 속상한 목소리로 타박했다. 민수와 내가 양쪽에서 어깨동무하듯이 부축해서 한 발로 내려가는 동작은 내리막 산길에서 더 위험했다. 손도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앞으로 엎어지면 꼼짝없이 치명상을 입었다. 재수 없어 얼굴에 돌부리가 닿기라도 하면 심각한 상처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민수와 내가 교대로 업고 가는 편이 훨씬 안전했다. 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더욱 조심해야 했다.
“먼저 민수 등에 업혀. 지치면 교대할 테니까.”
“그럴까?”
“기집애야! 뭘 망설여? 어서 업혀!”
언니가 고함을 질렀다. 민수는 희라를 업었다. 앞으로 넘어지거나 비틀거리면 붙잡기 위해 바로 뒤에 붙었다. 녀석이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볼 참이었다. 언니는 동생의 등산화 한 짝을 들고 앞장서 걸으면서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얼마쯤 내려가다가 후들거리는 민수의 다리를 보았다. 자칫하다 민수가 꼬꾸라지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괜찮아?”
“저기에서 교대하자.”
“나 때문에 등산을 망쳤네. 미안해.”
민수는 등산로 가장자리 바위 앞에 멈춰 섰다. 등산객들이 하도 앉아서 반질반질해진 작은 바위였다. 희라는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발목을 살폈다. 부기는 조금도 빠지지 않았다. 손으로 발목을 잡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얼굴이 우이암에 있을 때보다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희라 앞에서 등을 보여주었다. 목을 감싸는 희라의 팔을 느끼고 등 뒤로 두 손을 깍지 꼈다. 물컹한 그녀의 엉덩이가 손바닥에 닿았다. 샴푸 냄새가 몰려왔고 귓가에 입김과 숨소리가 다가왔다. 날씬한 몸매와 달리 조금 무거웠다. 통뼈였다. 등에 찰싹 달라붙은 그녀의 몸뚱이를 고스란히 느꼈다. 걸을 때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여자의 몸을 느껴본 두 번째 순간이었다. 쉬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으면서 산 아래까지 내려간다면 튼튼한 체력은 인정받을 수 있었다. 개마고원을 뒷마당 삼아 뛰어다니던 자신감도 있었다. 수애처럼 놓치지 않고 어떤 장애물이나 위험한 모험이 있을지 몰라도 삶의 저 끝까지 멈추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가야 한다고 되새김질했다. 세상의 가장 혹독한 비난이나 험악한 손가락질이 소나기처럼 쏟아져도 희라가 결심해 준다면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다. 발이 돌부리에 차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허벅지에 한껏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