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상황과 실존인식
1950년대의 소설을 중심으로
파괴와 살육의 비인도적 행위가 공적으로 승인된 戰場의 상황은 문화적인 상상력보다 사회참여적 성격의 고발과 증언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또한 인간 조건을 검토할 수 있는 극한상황이 자동적으로 상정된다. 여기에서 실존철학이 공감될 소지가 있다.①
극한상황은 실존조명을 할 수 있는 계기로서 투쟁·죽음·우연·허물 등이 구체적인 내용이며 이율배반적이며 고통으로 표현된다.② 또한 인간이 유한적 존재임을 깨닫는 상황으로서 어떠한 철학보다 인간이해에 초점을 둔 실존철학의 중요한 개념이다. 인간의 유한성은 부채·양심·숙명적인 투쟁과 사랑·공포·불안·죽음 등의 여러 한
계상황에서 드러나지만 특히 최후의 한계상황인 죽음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③
그 죽음은 자연사라기보다는 환경이나 부조리가 강요하는 죽음이며 전쟁체험을 다룬 소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극한상황을 맞닥뜨리면 인간은 시간적 존재이고 허무적 존재임을 깨닫지만 유한성을 제한에서 확보로 해석하는④ 방향으로 가면 죽음을 실존의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⑤
이때 죽음은 생의 연속이 끊어지는 곳이 아니요, 오히려 생의 의미가 집중되는 초점이다. 생은 그곳으로 향하여 집중되고 또 다시 거기서 반사하여 생의 전면적 구조가 조명될 수 있는 까닭에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 정의된다. 따라서 실존적으로 파악된 죽음은 현재의 우리 자신에게로 향하고 우리를 본래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힘을 가지며 생의 연속을 하나의 긴장된 통일체로 뒷받쳐주는 중심이다.⑥
결국 실존인식을 가진 죽음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시간의 종말이 아니라 생의 완성인 것이다. 자연사가 아닌 강요된 죽음 앞에서 삶 전체와 존재이유를 되짚어보는 순간에 실존의식이 싹틀 수밖에 없는 사실에 주목한 작품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실존인식을 감정의 차원에서 형상화하는 송병수의 「脫走兵」과 「殘骸」가 있다. 둘째, 인간의 유한성을 확보로 제시하는 실존인식을 형상화한 장용학의 「요한詩集」을 들 수 있다. 셋째, 극한상황에 대한 저항의지로서 실존인식을 보여주는 오상원의 「猶豫」를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인간의 문화적 존재방식인 가치체계와 생물학적 기초로서의 생존본능이 괴리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한계상황을 다룬 장용학의 「찢어진 윤리관의 근본문제」·「인간의 종언」·「부활미수」 등이 있다.
「脫走兵」은 자신의 가능성을 위해 投企하는 자유마저 철저하게 빼앗긴 상황으로서 한계상황을 보여준다.
박한서는 人共治下의 서울에서 의용군으로 강제 입대한다. 낙동강 전투에서 북쪽으로 후퇴하다 지리산 빨치산이 되고 빨치산 부대에서 도망쳐 나와 서울로 가던 중 검문소에서 붙잡혀 육군 훈련소에 강제 입소한다. 국군으로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무공훈장을 받는가 하면 이등중사로 특진한다.
적대적 감정이 들끓어 혁혁한 무공을 세워서가 아니라 적의 공격 예상로를 잘못 잡은 지휘관의 실수 때문이다. 그러다 한서의 분대는 사단본부의 경비를 맡는데 추위와 졸음에 쫓기는 부하들을 초소에서 철수시키고 “숯 굽던 토옥”에서 취침을 명령한다. 그러나 주번 하사관인 상사의 순찰로 초소가 텅 비여 있는 것이 밝혀지고 사단본부에서 대소동이 일어난다. “근무지 무단 이탈”로 끝날 죄목이 한서의 과거가 하나 둘 드러나면서 급기야 육군 본부로 후송 당한다. 도중에 하사의 도움으로 중위를 때려눕히고 자유의 몸이 되어 서울로 돌아가지만 발아래 서울의 불빛을 그윽이 내려다 볼 수 있을 뿐 그토록 가고 싶어하던 서울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캄캄한 어둠 속, 굽어보이는 멀리 시가의 불빛이 아물거렸다. 저기가 서울이다. 거기 내 집이 있다. 그러나 선뜻 내딛지도 못한 채 또 이제는 어디로 걸음을 옮겨야 할지도 모른 채 한서는 칵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끼는 어깨 위에 눈송이만 마냥 쌓여갔다.⑦
박한서의 극한상황은 한국전쟁이 가진 동족상잔의 속성을 배경으로 의용군이자 동시에 국군이던 자신의 자유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이중적 처지에서 비롯한다. 남쪽도 북쪽도 선택할 수 없어 가야할 방향을 잃은 불안에서 비롯하는 상황은 한계상황으로 발아래 집이 있음에도 갈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이다. 한번도 자유의지에 따라 남쪽이든 북쪽이든 선택해보지 못한 박한서가 닿는 실존조명은 허무적 존재라는 인식이다. 그것은 울음으로 나타난다. 예의 울음을 감정의 정점으로 보기도 하지만⑧ 가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이 죽음과 등가치화되어 있는 소설 내적 의미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잔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殘骸」에서 김진호 중위는 백 회 이상의 출격에 예상 이외의 전과를 올린 “불사의 보라매”이지만 야간출격을 나갔다가 愛機 무스탕이 대공포에 맞아 추락한다. 적지에 낙하산으로 떨어지는 순간부터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낙하산을 은폐하고 가장 먼저 안전한 은신처를 찾는다. 아군 비행기에 구조 신호를 보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마지막 식량인 통조림마저 먹고 난 뒤 추위와 허기는 더욱 집요하게 그를 괴롭힌다.
다행히 은신처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조난 당한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하고 先行者를 뒤쫓아가려 하지만 눈에 덮인 바닥은 방위조차 짐작할 수 없다. 오두막에서 훔친 고구마로 허기를 달래면서 적지에서의 탈출을 계속 시도한다. 그러다 아군의 폭격이 끝난 뒤 눈에 덮였으나 완연한 사람의 흔적을 발견한다. 선행자가 아군 비행기의 폭격을 유도하고 피해 달아난 흔적이다.
이어 남쪽 하늘에 나타난 헬리콥터가 그리 멀지 않은 건너편 산마루에 착륙한다. 그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며 그쪽으로 달려간다. 헬리콥터는 이내 선행자를 태우고 그의 절규에 아랑곳하지 하지 않고 남쪽으로 날아간다. 눈밭에 엎어져 송장처럼 꼼짝도 하지 않던 그는 불사의 보라매답게 탈출을 계속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愛機 무스탕의 잔해를 발견한다.
너무나 서러워, 너무나 억울해 왈칵 울음이 터졌다.
흐느껴 물결 이는 그의 등에 수북히 눈송이가 내려앉았다.⑨
분신과 다름없는 애기의 잔해 앞에서 김진호 중위는 당연히 “자기 몸뚱이가 박살이 난 것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적지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뒤에 비행기의 잔해를 발견하는 상황은 탈출 불가능을 암시한다. 시시각각으로 닥치는 추위와 허기를 염두에 둔다면 더욱 그렇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죽음 쪽으로 기울어진 한계상황이다. “너무나 서럽고 너무나 억울해” 울음을 터뜨린다고 하지만 감정적인 서러움과 억울함으로 보기보다는 「탈주병」과 마찬가지로 허무적 존재임을 실존조명으로 자각하는 울음으로 볼 수 있다. 감정적 차원에서 형상화되는 실존의식은 강요된 죽음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자각이 적확하게 형상화되지 않은 탓도 있으나 작품 내적 조건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유사한 상황 설정이 곧 실존주의 문학을 뜻하는 것으로 곡해한 영향도 없지 않다.
「요한詩集」에서 토끼와 누혜를 동일시할 수 있다. 어두운 대리석 동굴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던 토끼는 “어떻게 해서 이런 곳에서 살게 되었던가”라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시작한다. 이어 빛을 발견하고 바깥 세계를 인식한다. 비좁은 바위틈을 따라 굴 밖으로 나오지만 태양 빛 때문에 “홍두깨가 눈알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앓고 소경이 된다. 떠날 수 없던 토끼가 죽은 자리에 “자유의 버섯”이 자라난다.
숲 속의 많은 동물들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유의 버섯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절을 한다. 이러한 내용의 우화가 의미하는 것은 즉자적 존재에서 대자적 존재로의 발전이다.⑩ 어두운 동굴에서의 행복한 삶보다 자유를 획득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다분히 실존적인 발상이다. 피동적이고 비주체적인 즉자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대자로의 발전은 죽음을 실존의식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데 유한성을 제한이 아니라 확보로 바라보기 때문에 죽음은 생의 연속이 끊어지는 곳이 아니요, 생의 의미가 집중되는 초점이 된다. 따라서 토끼가 죽은 자리에 숲 속의 모든 동물들이 기억하는 “자유의 버섯”이 자라나는 것이다.
누혜는 의용군이 아니고 이북에서 쳐내려 온 북한군이다. “자유에의 길을 막고 있는 벽을” 뚫기 위해 인민의 영웅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이 뜯겨 나가고 내 피가 흘러내린 이 전쟁은 과연 내 전쟁이었던가”라며 회의한다. 赤旗歌를 부르지도 않고 틈만 있으면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곡식을 심는 생각에 골몰한다. 수용소 안에서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좌우익의 대립이다. 어느 한쪽에 가담하지 않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누혜는 반동분자로 몰리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며칠 뒤 그는 철조망 말뚝에 목을 매고 자살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視線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 視線이 얽혀서 비친 幻燈의 그림자를 떠낸 輪廓에 지나지 않았던 나는 비로소 나를 볼 수 있고, 나를 脫出할 수 있고, 안개 속으로 나타나는 世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自殺은 하나의 試圖요, 나의 마지막 期待이다.⑪
누혜는 자신을 둘러싼 온갖 눈길에서 해방되었을 때 즉 인민의 영웅이니 당연히 적기가를 불러야 한다는 시선에서 자유로운 온전한 자신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민의 영웅”이라는 본질보다 자신의 실존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式의 실존인식이다.⑫
그것은 또한 즉자에서 대자로의 발전을 뜻한다. 그의 시체가 두 세계를 갈라놓기도 하고 이어주기도 하는 철조망에 걸려 “하나의 突破口”를 마련했다는 동호의 판단이 “자유의 버섯”을 연상하게 한다. 따라서 누혜의 자살은 다시 굴속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실명한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토끼가 스스로 죽음을 맞은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 이와 같이 인간의 유한성 즉 죽음을 制限에서 確保로 인식하는 실존의식으로 볼 수 있다.
「猶豫」에서는 소대장의 내면심리가 실존조명을 향하고 있다. 소대장의 실존조명은 특정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실존을 궁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차원에서 실존조명이 이루어진다. 즉 개성적 개인으로서 소대장 자신이 놓여야 할 자리에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소대장이 놓인다. 이는 인물의 익명성과 관련을 맺는데 구체성을 상실하지만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내면은 모두 비슷하다는 묵시적 전제에서 비롯한다.
소대장은 이데올로기의 신념을 좇아 사상전향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어차피 죽어야할 존재이기 때문에 거부한다. 인간은 유한적 존재라는 인식이다. 그러한 인식의 밑바닥에는 어떠한 합리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다양한 국면이 낳는 극한상황은 계속될 수밖에 없으며 전쟁이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인간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보편적 인간의 실존인식이 깔려있다.
역사란 인간이 인간을 학살해 온 기록이니까요.⑬
인간은 역사 속에서 어차피 죽을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포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언급처럼 죽음 앞에 설 때 도구나 기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실존적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소대장은 전쟁이 강요하는 죽음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때 서술의 초점은 전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접근도 아니요, 반전의식의 고양도 아닌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대항의지로서 인간의 실존적 인식에 놓인다.
사상전향을 거부하고 죽음을 받아들이지만 존엄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는 전쟁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세계의 不合理에 대한 대항의지가 놓인다. 죽음 앞에서 존엄성을 지키려는 당당함으로 나타나는 대항의지는 비단 소대장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도입부분에 나오는 국군포로나 선임하사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개성적 개인이며 예외적 개인으로서 소대장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익명에서 알 수 있듯이 보편적 인간의 차원에서 실존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죽음 앞에서 당당히 인간일 수 있는 자긍심이야말로 신 앞에 선 단독자일 수 있는 조건이다. 아무리 지독한 한계상황일지라도 절망하지 않는 인물은 실존주의 문학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데⑭ 소대장 역시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다.
인제는 모든 것은 끝난다. 끝나는 그 순간까지 정확히 끝을 맺어야 한다. 끝나는 일초 일각까지 나를, 자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⑮
죽음이 인간의 모든 노력을 無로 되돌리긴 하지만 존엄성을 잃지 않는 태도는 실존적 의지를 천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고 공존할 수 없어 일어나는 전쟁이라는 부조리에 대한 대항의지로서 실존인식이다. 즉 실존조명이 예외적 개인이며 개성적 개인으로서 소대장을 단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을 단위로 하고 있으며 실존인식은 한계상황의 계기를 가져다 준 전쟁에 대한 대항의지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극한상황과 실존인식의 관계는 양상에 따라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감정적 차원에서 형상화되는 실존인식과 인간의 유한성을 제한이 아니라 확보로 인식하는 실존인식, 그리고 극한상황에 대한 저항으로서 실존인식이다. 감정적 차원에서 형상화되는 실존인식은 극한상황 속에서 실존적 자각이 감정의 차원으로 言表化되는데 감상적 분위기를 억제하기 못해 필요한 긴장을 상실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즉 허무적 존재로서 실존자각이 울음으로 드러나는 형식을 갖는데 죽음 앞에 선 단독자에 대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전쟁의 상황 속에 던져진 단독자로서의 모습이 더욱 강하게 부각된다. 극한상황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실존적 욕망을 도외시하고 상황인식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빚어진 실존인식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유한성을 제한이 아니라 확보로 인식하는 실존인식은 죽음을 유한성의 확보로 해석하는 데에서 비롯한다. 즉 유한성의 적극적 해석으로 인간을 되어 가는 운동과 과정으로 바라봄으로써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되어 가는 자유존재로서 生의 전체적 의미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셸링의 지적처럼 죽음을 마땅히 치러야 할 필연적인 것으로 현재의 시간 속에서 통찰할 때 생의 시간적 전체성이 확보된다. 동시에 실존의 본질이 자유임이 드러난다. 누혜의 경우 자유의 획득을 위해 죽음을 유한성의 제한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자유에 대한 시도요, 기대로 본다. 이는 죽음이 생의 연속이 끊어지는 곳이 아니라 생의 의미가 집중되는 초점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생의 전면적 구조로서 자유의 획득이 죽음을 시간의 종말이 아니라 완성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극한상황을 초극하려는 저항으로서의 실존인식은 죽음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자세로 나타난다. 세계의 부조리로서 전쟁은 죽음을 가져오지만 존엄성을 잃지 않는 태도는 절망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절대 조건이다. 의식의 중심이라는 서술기법을 통해 극한상황을 제시하고 죽음 앞에서 결코 절망하지 않는 인간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한계상황에 대한 대항의지로써 실존인식을 형상화한다.
따라서 한계상황과 실존주의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문학적 형상화의 과정에서 그것은 인과관계를 맺으며 전쟁의 강요된 한계상황에 대한 대응이 감정적 비탄이나 영탄에 빠지지 않고 서구적 문학정신에 기초함으로써 개화기 소설에 이어 한국 현대소설의 두 번째 근대화 작업이 이루어진다.⑯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영향관계의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우선 전쟁의 한계상황 아래 존재이유를 고찰하려는 실존조명을 공통점으로 들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존재를 가장 강렬하게 위협하는 전쟁에 대한 각성을 전제로 하는 그와 같은 실존조명은 전후 한국문학의 깊이를 더해 줄 뿐만 아니라 다양성에도 일조한다.
또한 한계상황이 실존조명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는 패러다임은 세계문학적 보편성을 획득한다. 한국문학의 서구적 문학정신과의 접맥이라는 평가가 가능한데 전후 신세대 작가들의 문학정신이 실존인식을 매개로 2차 대전 이후 서구 문학정신과 일정한 상동관계(homology)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① 김윤식, 한국현대문학비평사, 서울대 출판부, 1982, 270쪽.
② 우한용, 한국현대소설구조연구, 삼지원, 1990. 440쪽.
③ 조가경, 실존철학, 박영사, 1993. 138쪽.
④ 조가경, 앞의 책, 139쪽.
“생의 「직선적」인 시간적 계기의 순서에 따라 「최종적」이라고 보를 수 있는 한 점을 생의 절대점으로 보는 것이 곧 유한성을 이해하는 길은 아니다. 인간존재를 시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 인간을 되어가는 운동과 과정으로 본다는 것이며 따라서 결코 완결된 실체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원칙적으로 미완성이고 進行形에 있는 인간은 그 실체의 各自性에 있어서 결코 하나의 객체가 될 수 없다. 여기서 유한성을 이해하는 데에 또 다른 외적인 제약이 주어지는 셈이다. 즉 내가 나를 유일한 시간적 존재로 바라보려는 한 나의 시간성은 전제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을 지나치게 평가하지 말고 그 존재가 애당초부터 신과 죽음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음을 보이려 할 때 유한성을 「제한」으로 해석하는 것에서 「확보」로서 해석하는 방향으로 연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상으로서의 실체적인 인간 대신에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며 되어가는 자유존재로서 그의 전체적 의미를 파악하는 문제는 바로 유한성의 적극적 특징인 것이다.”
⑤ 조가경, 앞의 책, 144쪽.
셸링은 죽음에의 통찰을 통해 본래적으로 파악되는 미래는 죽음을 단순히 아직 오지 않은 그 무엇으로서가 아니라, 마땅히 치러야 할 필연적인 것으로서 자유로이 현재의 시간 속에 인수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앞질러 통찰할 때 생의 시간적 전체성이 확보된다.
이와 동시에 실존 즉 脫存의 본질이 “자기 자신에 대해 태도를 취할 수 있음”으로서의 자유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사르트르의 경우 인간의 존재이유를 제시할 모든 권위가 사라졌으므로 남은 것은 적나라한 실존과 자기책임성 즉 자유일 뿐이라고 한다. 어떤 보수도 없이 헛된 수고로 끝날 뿐이지만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위해 능동적으로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내맡기는 곧 投企하는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까닭에 보람있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⑥ 조가경, 앞의 책, 142쪽.
⑦ 송병수 외, 탈주병, 전후정예작가신작15인집, 육민사, 1963)
⑧ 김치수, 인간애의 세태소설 - 송병수론, 현대한국문학전집 14, 신구문화사, 1967. 495쪽.
⑨ 송병수, 잔해, 「현대문학」, 1964, 9.
⑩ Frank Lentricchia, 이태동·신경원 옮김, 실존주의의 여러 형태, 신비평 이후의 비평이론, 문예출판사, 1994. 74∼75쪽 참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문학에서 중요한 개념은 구토·번민·對自(pour soi)·卽自(en soi)·자유·허무·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등으로 볼 수 있다. 대자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卽自의 직접상태로부터 발전한 제2의 단계인데 他自에 대한 부정적 태도에 의해 자기 자신이 일정한 한계를 소유하는 실제로서 독립성을 주장하는 상태를 말한다.
⑪ 장용학, 요한시집, 「현대문학」, 1955, 7.
⑫ 조가경, 앞의 책, 326쪽 참고.
先行과 後行·본질과 실존의 구분은 기독교에서 신의 존재를 묻게 되면서 시작되었다.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 본질이란 언제나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內在하는 원리이며, 실존을 떠나 그 자체만을 따로 생각할 수 없다. 플라톤도 이 자연적인 세계를 만든 자가 누구며 어떠한 의지를 갖고 창조하였는지 물은 적은 없다. 混沌으로서의 세계가 코스모스로서의 세계보다 선행하였음은 인정하였지만 그렇다고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하지 않았다.
⑬ 오상원, 유예, 「한국일보」 1955, 1, 1.
⑭ 조가경, 앞의 책, 82쪽.
“로깡댕「구토」·마뛰「자유에의 길」·뫼르소「이방인」·뤼「페스트」는 각각 부조리의 경계에 부딪쳐 고민하면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세계에 어떠한 최종적인 합리적 의미가 있다는 확신에 도달한 것도 아니지만 그들은 절망과의 투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되어 있다.”
⑮오상원, 유예, 「한국일보」 1955, 1, 1.
⑯ 송하춘, 1950년대 한국소설의 형성, 1950년대의 소설가들, 나남, 1994. 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