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38선을 경계로 미소가 각각 주둔하자 한반도는 영토적 분단 상태에 놓인다.① 38선은 미소의 군정 영향력이 미치는 경계선으로 이 시기부터 대규모의 월남현상이 나타난다. 가장 주된 월남 동기는 북의 정치적 사회변혁이며 월남현상은 남북의 상이한 이념적·체제적 성격을 내포한다. 북한의 반제·반봉건혁명은 철저히 일반 민중의 이익을 위한 사회변혁이다.
따라서 북한 인구의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농민과 노동자인 민중은 월남할 유인을 갖지 못하고 주로 지주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경우 그들의 계급적 위치 때문에 월남하는 경향이 높다.②
이외에도 해방이 되면서 고향을 찾아 월남한 경우도 있으며 종교적 자유 때문에 많은 종교인들이 월남하였다. 이러한 타의적 실향은 공산이념을 피해 1․4후퇴 당시 국군의 후퇴와 동행하여 월남한 일반 민중의 실향과 더불어 이산문학의 자생적 토대가 된다.
198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분단문학에 대한 논의는 분단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거나 혹은 분단상황이 드러난 소설, 즉 분단의 원인과 고착화 과정, 분단이 현재의 삶에 미치는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다룬 소설 등을 대상으로 한다.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분단소설이 지속적으로 쓰여져 왔다는 견해는 분단상황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가 심정적이고 정서적 차원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1950년대 단편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실향의식은 분단인식의 기저를 이루는 본질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실향과 분단을 동일한 차원으로 논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실향과 분단의 등가성은 1960년대로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이념대립적·체제경쟁적 분단의 문학적 형상화를 위한 전제 작업임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1950년대의 분단인식이 갖는 기본적인 속성은 타의적인 실향이며 문학적 형상화는 정서적 차원의 귀향소망과 남한에서의 뿌리내리기로 정리할 수 있다. 귀향소망의 경우 대체적으로 이념을 배제하는 경향을 띠면서 고향에 대한 강한 집착을 형상화한다. 뿌리내리기는 귀향의 현실적 실현 불가능에 대한 각성을 전제로 하는데 귀향을 대신하는 차선책으로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인식하는 과정이 문학적 형상화의 대상이다. 실향의식과 뿌리내리기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월남 가족이 뿌리내기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전후현실과 정서적 차원의 귀향소망을 복합적으로 다룬 이범선의 「誤發彈」이 있다.
둘째, 국제전으로서 한국전쟁의 성격 제시와 휴전선을 배경으로 분단의 상황을 한 여인에게 투사한 이범선의 「丹楓」이 있다.
셋째, 절대적 귀향의지와 혈연적 이산으로서 분단의 속성을 제시한 전광용의 「地層」이 있다.
넷째, 실향의 고통과 죽음을 등가치화한 선우휘의 「望鄕」이 있다.
다섯째, 분단의 정치적 현실을 제시하면서 귀향소망이 뿌리내리기로 대체될 수밖에 없는 과정을 형상화하는 선우휘의 「테러리스트」가 있다.
여섯째, 불가피한 실향과 뿌리내리기의 상관성을 보여주는 이호철의 「他人의 땅」이 있다.
일곱째, 귀향소망의 좌절과 뿌리내리기를 할 수밖에 없는 분단현실의 인식과정을 형상화하는 이호철의 「脫鄕」이 있다.
「誤發彈」은 월남 가족이 전후현실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송철호의 가족을 전후사회의 구조적인 희생의 전형으로 보거나③ 혹은 전쟁으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들의 정신적인 황폐와 물질적인 빈궁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좌절감과 패배의식이 만연하는 전후현실을 집약적으로 고발하고 있다는④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송철호 가족의 불행은 보다 근본적인 것에 놓여 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의 이면에는 한국전쟁이 놓이는데 그들에게 전쟁의 결과는 실향의 현실이며 그것이 전후현실과 맞닿아 있다. 즉 경제적 궁핍과 정신적 황폐화를 속성으로 가진 전후사회와 타의적 실향이 복합화 하는 양상을 띤다.
가자는 것이었다.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옛날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렇게 정신 이상이 생기기 전부터 철호의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되풀이하던 말이었다.
삼팔선. 그것은 아무리 자세히 설명을 해주어도 철호의 늙은 어머니에게만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⑤
고향에서 제법 풍족하게 살아온 어머니에게 해방촌의 궁핍한 삶의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다. 철호는 실향의 대가로 자유를 꼽지만 그들 가족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다운 생활을 꾸려갈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이다. 실향하는 순간부터 행복한 삶의 조건을 결핍할 수밖에 없고 급기야 가족 하나하나는 암담한 전후현실 앞에서 타락해가며 적응할 수밖에 없다.
양공주가 된 명숙, 제대군인으로 돌아와 정신적 황폐를 보여주는 영호, 영양실조에 걸린 만삭의 아내, 귀향소망에 마침내 미쳐버린 어머니, “양심의 가시” 때문에 윤리적 자기 파멸을 거부하면서 살아가는 철호 등등이 실향민 가족의 면모이다. 영호는 암담한 전후현실 속에서 살아남고자 권총강도를 시도하지만 “인정선”에 걸려 경찰에 잡히고 아내는 병원에서 분만 중에 죽는다.
철호는 오랫동안 앓아오던 가난의 표징이면서도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한 인간의 사회적인 양심의 고통을 암시하는⑥ 충치를 뽑아버리고 방향 잃은 “가자”를 외친다. 철호의 拔齒를 사회의 중압에 철저하게 눌리는 존재의 깊은 통증을 뿌리째 뽑아 버리려는 배제의식의 상징적인 표상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타락한 사회에서의 양심의 소리이면서 또한 사회적인 절망의 역설로써 “가자”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나⑦ “가자”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전후현실 속에 놓인 실향민으로서 뿌리내리기에 대한 좌절의 외침으로 볼 수 있다. 즉 실향에 뒤이은 생존의 위협에도 양심과 윤리, 관습과 법의 한계 안에서 성실히 살아가고자 하는 철호는 타락한 전후사회에서 실향한 자의 정체성을 되묻는 목소리로써 “가자”를 외치는 것이다.
「丹楓」은 신문기자가 삼팔선 횡단 취재 중에 우연히 만난 외다리 여인에 대한 소묘로 이루어져 있다. 여인은 헤진 중공군의 솜저고리를 해병대의 옷 조각과 미군 군복의 헝겊으로 기워 입고 바지는 일제말기 몸뻬의 옷차림인데 한국전쟁의 국제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또한 외다리는 전쟁의 폭력적 성격을 폭로한다. 게다가 남편의 행방을 묻는 질문을 받으면 상황에 따라 “죽었다”든가 “월북했다”는 등의 이중적 답변은 한국전쟁의 정신적 외상(trauma)에서 비롯하는 진술공포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진술공포증은 올바른 진술이 차단된 건강하지 못한 시대적인 상황으로서 분단을 전제로 한다. 분단상황에 대한 거부와 부정은 여인의 삶의 터가 남북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은 비무장지대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어떻게 이북엘 갈 수 있나요, 어디?”
“그래도 가야디. 아버지 오마니가 다 거기 있는 걸.”⑧
지금은 갈 수 없지만 언젠가 귀향하겠다는 여인의 무의식적인 소망은 혈연적 뿌리를 회복하겠다는 강한 열망이 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여인의 귀향소망은 혈연적 뿌리의 상실에 대한 회복의지이며 혈연적 이산으로써 분단의 성격을 전제로 한다.
「地層」은 귀향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인식 아래 귀향의 대리욕구를 형상화하고 있다. 권노인은 딸 영희와 함께 西湖津에서 철수선을 타고 거제도에 도착한 후 대부분의 실향민이 그렇듯이 북행을 시작해 철암에 닿는다.
그는 속초에 가서 영희를 고향사람과 맺게 해주고 싶은 귀향의 대리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갱도가 무너져 죽고 영희는 탄광촌에서 자취를 감춘다. 귀향의 불가능처럼 귀향 대리욕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서사구조는 영토적 분단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가지는데 현실적으로 귀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권노인은 이산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웬 영문인지 초급 중학에 다니고 있던 영희 하나가 묻어 떠났다. 다른 식구들은 모두 버려 두고 그것 하나만이 무슨 바람에 휩싸여 붙어왔는지 통 모를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럴 때면 권노인은, 「다 운이야, 운」 하고 만사를 운명에 돌리고 체념을 곱씹는 것이었다.⑨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실향의 고통 앞에서 운명론은 체념으로 이어진다. “석 달 안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줄 믿었다”는 점에서 분단의 고착성은 보이지 않으나 혈연적 이산의 실향의식을 보여준다. 권노인을 통해 실향과 분단의 등가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귀향의 대리욕구가 사고사로 인해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남에서의 뿌리내리기 역시 실패로 나타난다.
실향 자체가 삶의 근간을 훼손하는 경우는 실향민을 문학적 형상화의 대상으로 설정한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이면에는 실향과 영토적 분단의 등가성이 핵심 요소로 자리한다.
「望鄕」은 고향집에 집착하는 이장환의 아버지를 통해서 실향의 고통을 제시한다. 아버지에게 “삼 년이 모자란 백 년을 지탱해온 고향집”은 혈연적 뿌리의 연속성를 상징한다. 남으로 내려와 비교적 성공적인 뿌리내리기를 일구어왔음에도 실향의 고통은 감소되지 않고 오히려 무의식을 통해 내면화된다.
따라서 고향집은 귀향소망의 매개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그러나 귀향의 현실적 불가능성 때문에 귀향소망은 대리충족으로 나타나는데 충청도 산골에 고향집과 흡사한 집을 짓는 것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대체물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같다고 해도 진짜 고향집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어렸을 적에 본 이장환의 할아버지의 얼굴을… 그리고 이장환의 아버지가 나이를 잡수실수록 그 얼굴이 그 아버지인 - 이장환의 할아버지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⑩
일인칭 서술자인 농하는 이장환의 아버지가 늪의 수면을 바라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추측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혈연적 연속성의 단절을 유사 고향집으로써 극복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죽음과 等價値化된 실향의식을 제시한다.
이처럼 뿌리내리기의 成敗와 관계없이 실향으로 인한 귀향소망은 현실적 장벽 앞에서 죽음과 동등한 무게를 갖는다.
「테러리스트」는 이념대결에서 이념대립으로 변한 분단성격을 제시한다. 길주·걸·학구 등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멸공청년으로 활동해 공산당에 대한 테러활동을 하였으나 대결이 아닌 대립의 정치적 변화를 맞는다.
학구는 공장에 취직하여 노동자를 감시하는 경제깡패로 길주는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김가를 돕는 정치깡패로 변신한다. 걸은 멸공보다 반공을 앞세우는 정치적 현실 앞에서 좌절과 울분을 갖는다. 귀향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형님, 난 원수를 갚우야 하디 않소? 나 이남으루 온 댐에 우리 아바지 잡아다 가두와서 죽게 한 놈덜 난 그대루 둘 수 없수다. 형님, 이리케 오래 가문 이북에 두구 온 동생새끼 빨갱이 다 되디 않갔소.”
걸의 얼굴에 괴로운 표정이 흐르며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 니박사한테 형님이 가서 니야기하믄 되디 않소? 우린 아직두 주먹이 든든하우다.”⑪
국제정세와 UN 등의 세계 정치의 흐름을 이해할 수 없는 걸은 성기 형님에게 하소연을 해보지만 정치적 객관현실은 멸공의 적극성에서 반공의 소극적 경향으로 변화한다. 그러한 객관현실은 이념대결에서 이념대립의 시대적 환경으로 변모하여 분단의 고착성을 갖는 계기가 된다. 분단의 고착성은 실향민에게 귀향보다는 뿌리내리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한다. 걸 역시 농장으로 내려갈 작정을 한다.
정치현실의 구체적 변화는 선거 유세장에서 나타난다. 평화통일의 비전을 얘기하는 연사를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청년들이 있는가 하면 걸은 청년들에게 빨갱이로 몰려 집단 테러를 당한다. 귀향을 위해 “빨갱이”이라면 거침없이 주먹을 휘두르던 걸이 오히려 청년들에게 테러를 당하는 아이러니는 정치적 차원에서 멸공 이데올로기가 쇠퇴하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양산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실향민이 뿌리내리기를 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환경을 이념의 지향성 변화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他人의 땅」은 뿌리내리기와⑫ 실향의 상관성에 주목하면서 실향한 삶의 무의미를 형상화한다. 실향이 자아정체성을 상실하는 절대적 계기로 작용하여 뿌리내리기에 실패하는데 실향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상섭·상운·상국은 피난지 부산에서 혈연적 뿌리가 뽑힌 삶을 살아간다.
귀향의 염원조차 나누어 갖지 않기에 당연히 형제라는 정체성(identity)을 잃고 제각기 살아간다. 실향이 귀향소망을 갖도록 하는 내적 동기가 되지 못하며 형제 사이의 심리적․정신적 통합 요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
어쩌다 얻어걸린 여자와 시한부 동거를 하는 상섭, 출판사 교정원으로 일하면서 형제애를 거부하는 속물 상운, 살아가는 것에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현실을 깨닫는 상국. 이들 삼형제는 제각기 퇴락한다.
상국은 이 바닥에서 살아간다는 일의 크나큰 무의미를 이곳에 나와서야 절실하게 터득한 것 같았고, 그렇게 알았을 때, 이미 그의 앞에는 살아갈 건더기라고는 없는 듯 하였다.⑬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이고 형제임을 거부하는 것은 형제살해(fratricide)의 속성을 가진 전쟁의 영향도 없지 않아 있으며 “우리 집안이 어쩌다가 이렇게 망해 버렸니?” 묻는 상섭은 실향민이 갖는 삶의 무의미에 집착한다. 즉 실향민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귀향소망도 갖지 못하고 폐인의 생활을 하다가 투신 자살한다.
아내의 노동력에 의지하는 상운이나 정상적인 삶의 절차인 결혼식을 무시하고 동거하는 상국 역시 귀향소망을 갖지 않는다. 혈연적 뿌리가 없는 땅에서 전쟁의 원인인 이념에 대한 적개심을 보이거나 혹은 내면화된 귀향소망을 가지고 뿌리내리기의 출발을 감행하는 것이 일반적 전개 양상이지만 실향이 귀향소망으로 전이되지 않고 삶의 무의미로 치달을 때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은 실향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다.
“이게 분명 우리 땅은 우리 땅인데, 우리 땅은 우리 땅인데, 희한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희한하다, 무엇이 이리 간지럽노? 전신이 근질근질 근지럽노?”⑭
이러한 결말은 타의적 실향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근대사를 관통하는 작품 내적 인과성으로 볼 때, 식민시대에 이어 연속하는 한국전쟁은 실향의 타의성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민족사 차원의 거대사건에 희생될 수밖에 없는 소시민으로써 삼형제의 삶은 실향의 타의성과 뿌리내리기에 철저히 실패하는 실향민의 전형을 보여준다.
「脫鄕」은 귀향소망의 내면화가 뿌리내리기로 나타나는 사실에 주목한다. 광석·두찬·하원과 “나”는 중공군이 밀려온다는 바람에 대규모 1․4 후퇴 당시 무턱대고 LST를 타고 부산거리에 부려진다. 부두에서 막노동으로 호구하며 화차간에서 잠을 자는 등 한시적인 생활을 한다. 귀향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집성촌에서 아저씨 조카 하는 처지이고 같은 실향민으로서 깊은 동정심과 동지애를⑮ 지녔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 달쯤 지나자 고향으로 돌아갈 날은 아득해지고 귀향소망으로 똘똘 뭉친 결속력이 와해되기 시작한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각자의 실속 즉 차선책인 뿌리내리기에 제각기 골몰할 수밖에 없다. 분단의 객관현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고향에 대한 감상적 그리움과 서로에 대한 부담감은 타개해야할 과제로 남는다.
쉽사리 고향으로 못 돌아갈 바엔, 늘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다. 다른 변통을 취해야겠다. 두찬이와 광석이는 나머지 셋 때문에 괜히 얽어매여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연 우리 사이는 솔직하지 않고 흘끔흘끔 서로의 눈치를 살피게끔 됐다. ⑯
뿌리내리기는 구체적으로 한시적인 생활 터전인 화차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거주공간으로서 집을 마련하는 것이지만 성격이 서로 다른 광석과 두찬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달리던 화차에서 뛰어내리다 광석이 심한 부상을 입어도 두찬은 냉담함을 보인다. 뒤늦게 두찬은 “나”를 찾아와 푸념을 늘어놓는다. 푸념은 다친 광석을 외면했다는 자책감에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차원이다.
광석의 죽음은 서로에 대한 부담감이 해소되는 결정적인 계기이며 제각기 뿌리내리기를 시도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같은 실향민으로서 집성촌의 아저씨 조카 사이라는 전통적 혈연관계가 뿌리내리기에 장애가 되는 것은 「탈향」의 뿌리내리기가 얄팍한 인정주의와 감상주의와의 결별을 내포하며 비장한 영탄조의 50년대 소설과의 결별이라는 문학사적 의미를⑰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원이 “나”에게 “둘이서 영주동 산꼭대기에 집을 하나 사자”면서 건네는 말에서도 귀향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데 “나”는 감정적이고 정서적 차원에서 비롯하는 귀향소망과 결별하기 위해 하원을 떠나기로 작심한다. 귀향소망이 타자서술에서 얻어진 효과라면 분단인식은 자기서술로 획득된다.⑱
무엇인가 못 견디게 그리운 것처럼 애탔다. 그러나 누가 알랴! 지금 내 마음 밑 속에서 일어나는 돌개바람 같은 것을… 아 어머니! 이미 내 마음 밑 속에선 하원이를 버리고 있는 것이다. 순간,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와락 하원이를 끌어안았다. 눈물이 두 볼을 흘러내렸다.⑲
광석은 죽고 두찬은 자책감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는 하원을 떠나 뿌리내리기를 결심하는 부분이다. 즉 능동적으로 분단의 객관현실을 받아들일 때 실향의 내면화를 통한 뿌리내리기가 탈향이라는 패러다임을 발견할 수 있는데 50년대적 삶과 결별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의 천명이다.
고향에 대한 감상적 그리움과 결별하는 행위가 분단인식에 이르는 과정이며 이는 귀향소망을 내면화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뿌리내리기로 나타난다. 따라서 타의적 실향과 뿌리내리기 사이를 연결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으로서 귀향소망의 내면화를 꼽을 수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실향 및 분단의 인식과정에서는 혈연적 이산으로써 가족의 해체를 동반하는 실향에 근거하는 귀향소망을 주목할 수 있다. 이는 영토적 분단인식과 맞물리면서 실향과 분단의 등가성을 보여주며 귀향소망은 이데올로기적 분단인식의 결여로 정서적 차원에 머문다.
현실적인 귀향의 불가능성 때문에 귀향소망은 내면화되고 뿌리내리기를 차선책으로 선택하게 된다. 멸공에서 반공으로의 정치적 변화에 따른 뿌리내리기가 있는가 하면 귀향의 현실적 불가능에 따른 뿌리내리기도 있는데 실향의 고통과 죽음을 等價値化하거나 귀향소망이 내면화되면서 실향한 삶의 무의미를 형상화하기도 한다. 실향의 기본적인 속성은 공산 이데올로기를 피해 월남할 수밖에 없는 타의성에 있다.
타의적 실향은 영토적 분단과 등가적 가치를 가지며 귀향소망의 실현 불가능이 점차 현실화되면서 실향의 고통은 내면화된다. 뿌리내리기는 내면화된 귀향소망을 전제로 하는데 혈연적 연속성의 단절로 인한 파편화된 삶을 낳는다. 특히 실향과 뿌리내리기를 연결해주는 내면화된 귀향소망을 결핍할 경우 정체성의 상실을 가져오며 무의미한 삶으로써 실향민의 전형을 제시한다.
① 한국전쟁 이후 38선은 휴전선으로 대체되어 남북의 왕래가 자유롭지 않게 되고 동족살상과 형제살해의 이념대립적‧체제경쟁적 의미를 가진 국경선으로서 분단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다행히 1950년대의 분단은 분단상황이 반영구적인 고착성을 갖기 이전이고 이념대립을 전제로 하는 체제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일뿐만 아니라 전후의 제반 특성들이 시대성으로 대두되는 시기여서 분단에 대한 인식은 비교적 기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즉 단순한 영토적 분단으로써 실향의 문학적 형상화가 主流를 이루며 피상적인 형태의 이념대립적․체제경쟁적 분단의 형상화가 支流에 속한다. 따라서 1950년대의 분단인식의 根底에는 실향의식이 놓여 분단과 실향의 등가성을 보이며 離散文學으로써 분단문학이 출발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② 강정구, 해방 후 월남인의 월남동기와 계급성에 관한 연구, 한국전쟁과 한국사회변동, 풀빛, 1992 99쪽.
③ 이재선, 앞의 책, 215쪽.
④ 권영민, 앞의 책, 157쪽.
⑤ 이범선, 오발탄, 「사상계」, 1960, 10.
⑥ 이재선, 앞의 책, 216쪽.
⑦ 이재선, 앞의 책, 217쪽.
⑧ 이범선, 단풍, 「현대문학」, 1967, 5.
⑨ 전광용, 지층, 「사상계」, 1958, 6.
⑩ 선우휘, 망향, 「사상계」, 1965, 8.
⑪ 선우휘, 테러리스트, 「사상계」, 1956, 12.
⑫ 이상갑, 앞의 책 132쪽.
논자는 이호철 소설이 단순히 고향상실로 인한 뿌리내리기 문제 그 자체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도 오히려 일종의 이북인의 내적 자존심이랄 수 있는 고향의식 내지 성지의식이 더 문제가 된다고 본다.
⑬ 이호철, 타인의 땅, 「문학춘추」, 1964, 4.
⑭ 이호철, 앞의 책.
⑮ 이상갑, 무위감의 정체와 집의 의미, 1950년대의 소설가들, 나남, 1994, 144쪽.
⑯ 이호철, 타인의 땅, 「문학춘추」, 1964, 4.
⑰ 정호웅, 앞의 책, 56쪽.
⑱ 한 작품 안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서술상황을 고려해 서술자가 초점대상이 되는 경우는 자기서술이며 초점대상이 서술자가 아닌 다른 인물일 경우는 타자서술이다.
⑲ 이호철, 타인의 땅, 「문학춘추」, 1964,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