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시스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Aristotle의 시학을 살펴보자. <시학> 제6장을 보면
비극은 드라마적인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catharsis를 행한다.①
카타르시스에 대한 이 이상의 설명이 없기 때문에 Aristotle이 이 용어를 어떤 의미에서 사용하였는지 알 수 없다.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catharsis는 ‘감정의 정화’를 의미한다는 윤리적인 견해와 ‘감정의 배설’을 의미한다는 의학적인 견해」로 양분된다.
전자는 바로크 시인들, 프랑스 고전주의 시인들과 더불어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이② 주장하는 견해이고 후자는 J.Bernays가 주장하는 견해이다. 문맥으로 보아 “연민과 공포”를 전제하지 않으면 catharsis를 논의할 수가 없다. “연민과 공포”는 Plot에 의한다기보다는 Story에 의해 유발된다. <시학> 13장을 살펴보면,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되며, 공포의 감정은 우리 자신과 비슷한 자가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된다.③
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것으로 이야기(story)와 관찰자(observer)를 이미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문제는 story와 observer의 거리이다. 둘 사이에는 심리적인 일체감이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져야만 연민과 공포가 형성될 수 있다. 또한 연민과 공포가 일어나야만 catharsis가 존재할 수 있다. 작중 인물이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되는” 연민의 감정은, 그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observer의 가치관이 기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감정의 판단이며, 그 판단은 당대의 문화적·역사적 상황과 관계있다.
가령 Los Angeles의 흑인 폭동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충분한 이해가 가능하다. Rodney King에 가한 백인 경찰의 폭력은 많은 흑인들로부터 “부당하다”는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연민의 감정은 “자신과 비슷한 자가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되는 공포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Rodney King 사건은 허구가 아니기 때문에 감정의 catharsis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매개가 필요했고 그 매개가 한인에 대한, 한인 상가에 대한 약탈과 폭력이 되었다. 흑인들은 한인에 대한 폭력과 약탈을 통해서만 감정의 catharsis를 가질 수가 있었다. 이것은 한인들이 소수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백인처럼 행동하고 사고하고 살았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정리해 보자. Rodney King에 폭력을 가한 자들은 백인이며 경찰이다. 폭력 현장을 본 대다수의 흑인들은 “부당한 불행”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자신도 언제 저런 “불행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빠진다. 이러한 심리적 상황은 동일시 현상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런 감정의 덩어리는 catharsis를 요구한다. 그것은 catharsis를 하게 할 매개를 필요로 하며 흑인들은 정작 백인들을 상대로 catharsis를 얻어낼 수가 없다. 따라서 백인처럼 살아가는 한인(韓人)들에게서 catharsis를 얻어낼 수밖에 없다….
이야기가 지루하다. 분명한 것은 catharsis는 연민과 공포를 전제로 하고 그것을 전제하게 하는 심리적 현상은 동일시 현상이다. 동일시 현상에 의해 작중 인물과 관찰자는 심리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소외효과(Verfremdung)를 살펴보자. 소외효과(소격효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에 의해 개진되는데 서사극의 중추신경이다. 소외효과(Verfremdung)를 파악하고 있으면 서사극의 절반을 알고 있는 셈이다. 먼저 John Willett이라는 브레히트 연구가가 번역한 소외효과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소외효과를 이룩하려면 배우는 극중 인물로의 ‘완전한 전환’을 포기해야 한다. 배우는 극중 인물을 보여주고 그의 대사를 인용하며 실생활에서 일어난 일을 반복한다. 관객은 완전히 넋을 잃지 않는다. 심리적 일체감을 느낄 필요도, 묘사되는 운명에 대해 숙명론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도 없다. <극중 인물이 기쁨을 느낄 때 분노를 느낄 수도 있다. 관객은 자유롭다. 때로는 별도로 사건의 전개를 상상하거나 새로운 전개를 찾도록 고무되기도 한다.> 극의 사건은 역사화되고 사회적으로 정립된다.④
소외효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가 고안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연극적 관습을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한 것이다.
중국의 곡예사는 무엇보다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벽 이외에 또 하나의 네 번째 벽이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하지 않는다. 그는 관객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즉시 유럽 무대의 일정한 환상을 제거시켜 준다. 관중은 실제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의 숨은 관객이라는 환상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⑤
제4의 벽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마당극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자세는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화자로서 작가를 인정하고 작가가 소설을 써 나가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소외효과(Verfremdung)는 연기자(actor)와 극중인물(role)의 분리를 기초로 하며 이야기와 관찰자의 분리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동일시에 기초를 둔 심리적 일체감을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가 소외효과를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받아 개진한 것이라는 추측은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으나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주창한 <낯설게 하기>와 <소외효과>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둘의 영향 관계가 전무하다고는 보기 어렵다.
서사극은 극작가(playwright)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극작가는 관객에게 의견을 제시할 뿐이며 의견이 고스란히 관찰자에게 수용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전통극의 극작가는 전지전능의 신이다. 그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하며 관찰자가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요구한다.
Hamlet이 숙부(叔父) Claudius를 훔쳐보며 고통스러운 몸짓과 표정으로 천천히 <to be or not to be ― That's the question(복수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다)>이라고 중얼거릴 때 관찰자 역시 마음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린다.
메타픽선(meta-fiction)은⑥ 작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몰락에서 오는 것이며 작가의 몰락은 작가의 권위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미 브레히트에 의해 실험되었던 작가의 몰락이 소설로 드러난 것이 메타팩션으로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작가의 몰락은 심리적 일체감을 배제하는 데에서 나오며 심리적 일체감을 배제하는 것은 소외효과가 노리는 결과이다. catharsis는 감정에 호소하며 소외효과는 이성에 호소한다.
결론적으로 catharsis와 Verfremdung는 동전의 양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① Aristotle, Poetics(시학),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47쪽.
② 독일의 극작가‧비평가. 독일 고전 희극의 창시자. 18세기 독일 계몽주의의 지도자. 작센의 카멘츠에서 출생. 목사의 아들로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의학과 신학을 배웠다. 아나크레온풍의 시를 짓고 연극에도 관심을 가져 초기의 희극 <젊은 학자, Der junge Gelehrte, 1747>는 노이버 극단이 상연했다.
뒤에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에서 자유로운 문필가로 활동하고, 니콜라이·브레슬라우의 방위군 사령관이 된 타우엔친 장군(Friedrich Bogislaw von Tauentzien, 1710∼1791)의 비서가 되었다. 볼펜뷔텔이라는 소도시의 도서관 사서가 되고, 그 후 같은 일에 종사하였다. 그의 친구인 함부르크 상인의 미망인(Eva König, 구성(舊姓)은 Hahn, 1736∼1778)과 약혼, 뒤에 결혼했으나 사별했다.
그는 풍부한 고전적 교양을 가지고, 명쾌‧예리한 두뇌와 문재(文才)로써 진리를 구명한 사상가로 계몽사상을 완성했다. 극작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디드로‧셰익스피어의 저서를 가까이하면서 시민적인 희곡을 지어 성공했다. 독일 고전극의 기초를 만들고 작가의 사회적‧국민적 사명을 위해 노력했다.
대표작은 비극 <Miss Sara Sampson, 1755>, <Emilia Galotti, 1772>, 희극 <Minna von Barnhelm, 1767> 등이 있고, 비평가로서는 니콜라이 및 멘델스존과 협력 간행한 <문학서간, Literaturbriefe, 1759∼1765>, 함부르크 국민극장 시대에 집필한 <함부르크 연극론, Hamburgische Dramaturgie, 1767∼1769>이 창조적 비판의 모범이 되고, 미학 논문 <Laokoon, 1766>으로는 당시의 오견을 시정, 공간적 예술인 조형예술과 시간적 예술인 문학과의 구별을 분명히 하여 영향을 주었다.
종교 사상의 방면에 있어서는, 신의 계시란 역사에 있어서의 인류의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관용과 인도를 중요시하여 인류의 진보를 믿었다. 생애는 불우한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결한 정신으로써 창작‧비평 양쪽의 활동으로 근대 독일문학의 초석을 쌓았다. 볼펜뷔텔에서 사망했다.
③ Aristotle, Poetics(시학),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74쪽.
④ Arnold P.Hinchliffe, The Absurd(부조리문학), 황동규 옮김, 서울대학교 출판부. 6쪽.
⑤ 李源洋,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後期戱曲硏究, 서울大學校 獨語獨文科 박사학위논문, 1984. 67쪽.
⑥ 허구를 구축하면서 동시에 그 구축방법에 대해 말하는 소설.